남한강 구비구비 375㎞, 여강에서 꽃 한송이 피우다 ... 월간산
고려 말 나옹선사의 다비식이 거행됐던 자리에 조그마한 삼층석탑이 서 있다. 바로 옆자리 정자 강월헌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남한강 제일의 조망처다.
강원도 태백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정선·영월을 지나 충청도 단양·충주 땅을 적신 뒤 경기도 여주를 지나 양평 두물머리에서 북한강을 만나 한강이란 이름으로 서해로 흘러든다. 고을들을 지날 때마다 조양강·동강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여주를 휘감아 도는 남한강은 여강驪江이라 불렀다. ‘검은 말驪을 닮은 강江’이라는 뜻의 여강은 긴 남한강의 물길 중 여주 지역 40여 km 구간에 붙은 이름이다.
남한강은 조선시대 물류와 교통의 요충으로 여주에만 12개의 나루터가 있었다고 한다. 한강을 이루는 남한강·북한강 두 줄기 중에서 특히 남한강은 조선시대에 물자의 운송과 사람들의 이동에 중요한 물길이었다. 지방에서 거둬들인 세곡稅穀을 실어 나르고, 한양을 오가는 사람들이 지나는 교통 요지였다. 남한강 물길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구간이 여주 일대였다. 조선 4대 나루인 이포나루와 조포나루도 여주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강변엔 정자 10여 동이 자리했을 정도로 경관이 수려하다. 고려시대부터 이규보·이색을 비롯한 많은 시인묵객이 머물렀고, 당대 내로라하는 문사 중 이곳을 그냥 지나친 사람은 없었다.
조선 초에 건립된 조사당.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바로 앞 향나무는 수령 600년을 자랑한다.
남한강 물줄기 중에서 여주 부근을 여강이라고 불렀다. 여강 가에 자리 잡은 신륵사는 사찰 중에서 드물게 강변에 위치했다.
아름다운 여강과 그곳에 깃든 풍부한 인문사회학적인 명소들을 음미하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이 ‘여강길’이다. 모두 12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길이는 120㎞쯤 된다. 이 가운데서 특히 3코스와 4코스는 세종대왕과 효종의 능陵, 천년사찰 신륵사 등이 어우러진 대표적인 역사문화 탐방길이다.
37번국도를 타고 세종대교를 건너면 영릉英陵이다.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재위 1418~1450년)과 부인 소헌왕후 심씨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영릉에서는 풍수 얘기를 빼놓을 수 없을 듯하다. 세종의 무덤은 처음엔 경기도 광주 대모산大母山(지금의 서초구 내곡동)에 있었다. 세종은 세상을 떠나기 전 “혼백이나마 부모님께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올리겠다”며 이곳에 묻히기 원했다. 이후 파란이 일기 시작했다. 세종에겐 자식이 많았다. 소헌왕후 심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8대군, 2공주를 비롯해 후궁과 궁인들에게서 10군, 2옹주를 뒀다. 조선 왕조 역사상 유례없는 왕실의 번창이었다. 그렇지만 세종의 왕위를 이어받은 문종이 2년 만에 세상을 뜨고, 그 아들인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영월로 유배됐다가 목숨을 잃었다. 결국 이 사건 전후로 세종의 22명이나 되는 자식 가운데 단 한 명, 수양대군(세조)만 남고 모조리 목숨을 잃었다. 변고가 잇따르자 조정 일부에서는 영릉의 터가 부실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나옹선사와 지공대사, 무학대사의 진영을 모신 조사당.
하지만 세조 때는 여러 반대에 부딪혀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1469년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세종대왕릉이 새로 자리 잡은 여주의 이곳은 원래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묘가 이미 들어와 있었는데, 왕릉으로 선택되면서 이를 옮기게 하고 세종이 들어온 일은 두고두고 화젯거리가 됐다. 이번엔 명당이었던 모양이다. 풍수가들은 영릉의 형국을 산세가 봉황이 알을 품듯 영릉을 감싸고 있는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 산봉우리들이 반쯤 핀 모란 꽃송이처럼 영릉을 둘러싸고 있다는 ‘모란반개형牡丹半開形’, 용이 돌아서 영릉을 쳐다본다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이라고 칭송했다.
양평 쪽에서 내려온 우두산과 혜목산 줄기가 부드럽게 남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여강 가에 이르러 살짝 봉우리를 올린 나지막한 산이 봉미산이다. 봉미산과 여강이 만나는 자리에 천년 고찰 신륵사神勒寺가 있다. 사찰로는 드물게 강변, 평지에 자리 잡은 신륵사는 일주문에서 사찰 안쪽까지 남한강을 따라 평탄한 흙길이 이어진다. 힘들이지 않고도 고즈넉한 사찰과 주변 풍경을 구석구석 둘러볼 수 있다.
여강가 절벽 위에 선 벽돌탑. 고려 때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이 탑은 옛날 남한강을 오가는 배의 이정표 역할을 했다.
신륵사가 오늘날과 같은 큰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고려의 큰 스님 나옹선사 때였다고 한다. 병이 깊었음에도 왕명을 받들고 밀양으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선사가 당시 보인 이적 때문에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세종 능을 여주로 이장할 때 세종대왕의 원찰願刹(죽은 이의 명복을 빌던 법당)이 되면서 중흥했다. 조사당祖師堂(보물 제180호)은 신륵사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여말선초에 선종을 이끌었던 고승인 지공·나옹·무학의 영정이 있다. 정면을 한 칸으로 한 이유는 앞문을 열어젖히면 세 분의 영정을 모두 볼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600년 된 향나무와 조사당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향나무는 무학대사가 스승 나옹화상을 추모하기 위해 심었다고도 하고, 이성계가 심은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신륵사 다층석탑. 보물 제225호로 흔히 볼 수 있는 화강암 재질이 아니라 대리석으로 다듬은 조선 전기 작품이다.
신륵사의 탑들은 특이하다. 우선 극락보전 앞에 있는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흔히 볼 수 있는 화강암 재질이 아니라 대리석으로 우아하게 다듬은 조선 전기의 작품이다. 조각기법이 돋보인다. 몸돌엔 용을 새겼는데, 눈과 비늘·발톱까지 섬세하다. 또 하나는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기단은 화강암인데, 탑신부는 벽돌로 쌓은 고려시대 탑이다. 이 전탑은 등대 역할도 했다고 한다. 남한강을 따라 내려오던 뱃사공들이 이 전탑을 보고 여주에 다다랐음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탑 아래쪽 강가 바위엔 아담한 삼층석탑과 강월헌江月軒이라는 정자가 있다. 삼층석탑은 자연석 바위를 기단으로 삼았는데, 나옹선사를 화장한 자리라고 한다. 신륵사를 찾았다면 강월헌에 올라 강변을 바라보며 강바람을 쐬는 일을 빼놓을 수 없다. 삼층석탑과 아담한 정자 너머로 내려다보는 여강의 풍치는 한 폭의 동양화다. 삼층석탑도, 정자도 모두 지정된 보물은 아니지만 여강과 어우러진 풍경 그 자체가 보물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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