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3 15:42:39
https://www.chosun.com/culture-life/art-gallery/2021/03/23/BL4EQBO6MBCXXCM2WVA7D6FJXE/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세기의 컬렉터 5人
문화는 선별과 여과의 오랜 역사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떤 리스트를 제출하느냐는 것. 서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의 ‘지하철에서 만나는 최고의 풍경 5’로 시작한 ‘당신의 리스트’ 제12회에선 서울 사비나미술관 이명옥 관장이 직접 고른 세기의 컬렉터 5명을 소개합니다. 졸부는 결코 이룰 수 없는 문화적 성취, 자칫 사라질 수도 있었던 보배를 보전한 진정한 부자들. –편집자
돈만 많다고 세기의 컬렉터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재력과 안목과 열정, 이 셋을 모두 충족해야 미술사(史) 흐름을 주도한 명작의 소유 자격을 얻는다. 왜 미술품을 모으는가? 집을 꾸미려고, 취향을 과시하려고, 예술가를 후원하려고, 작품을 보존하려고, 유산으로 물려주려고, 되팔아 수익을 얻으려고…. 세상에 수많은 수집가와 수집의 이유가 있지만, 위대한 컬렉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최근 이건희(1942~2020) 삼성그룹 회장의 국보급 개인 미술 소장품 향방이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컬렉터의 사회적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이때, 최고의 컬렉터 5인을 꼽았다.
페기 구겐하임(1898~1979)
미국 현대미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전설적 컬렉터.
광산 재벌 가문의 3세인 페기는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상속받은 재산으로 유럽 초현실주의와 미국 추상표현주의 거장의 작품을 수집해 가히 세기의 컬렉션을 완성했다. 전위미술의 선구자 마르셀 뒤샹(1887~1968)의 도움으로 유망 작가를 소개받아 작업실과 전시회를 누비며 안목을 키웠고, 갈고 닦은 안목을 바탕으로 활발한 후원에도 나섰다. 당시만 해도 별 주목을 못 받던 화가 잭슨 폴록(1912~1956)의 첫 개인전을 연 곳도 그녀가 뉴욕에 설립한 ‘금세기 미술 화랑’이었다. “나는 이 전시가 미국 현대미술사의 획기적 사건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렇게 선언한 페기는 폴록에게 1년간 매달 150달러씩 창작활동비까지 지원했다. 바닥에 펼친 화폭에 물감을 떨어뜨리는 이른바 ‘액션 페인팅’은 이 같은 전폭적인 후원에 힘입어 세계적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페기는 수차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현대 추상 조각 거장 콩스탕탱 브랑쿠시(1876~1957) 등 위대한 예술가들과 숱한 염문을 뿌렸다. 페기의 세 번째 남편은 초현실주의 대표 화가 막스 에른스트(1891~1976)였고, 그의 걸작도 ‘페기 컬렉션’에 포함돼있다. 1979년 페기는 자신의 소장품 전부를 재단에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나는 미술 컬렉터가 아니라 미술관이다(I am not an art collector, I am a museum)”라는 말을 남겼다. 그녀의 컬렉션만으로 구성된 미술관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이 이듬해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들어섰다.
독일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의‘대립교황’(1941~1942). 제목은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교황 지위를 주장한 성직자를 뜻한다. 에른스트는 페기 구겐하임의 세 번째 남편이었지만, 곧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그림 속 붉은 옷은 해당 여인, 창을 든 오른쪽 여인은 페기를 형상화한 것이다.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
헬렌 크뢸러 뮐러(1869~1939)
20세기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개인 컬렉션을 소장했던 최초의 여성 수집가다. 독일 기업가 집안의 딸로, 남편의 사업적 성공으로 재력을 키웠다. 헬렌의 수집 목록은 피카소·몬드리안·쇠라 등의 걸작을 포함해 1만점이 넘는다.
그리고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있다. 고흐의 대표작 ‘밤의 카페 테라스’를 포함한 그녀의 고흐 컬렉션은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 다음으로 방대하다. 헬렌이 고흐의 그림을 집중적으로 수집하던 1910년대만 해도, 고흐는 숭배의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일찌감치 고흐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화가 겸 평론가였던 헹크 브레머에게 개인 미술 자문을 하며 경매 및 화랑에서 고흐 작품을 열정적으로 사들였다. 하루에 7점을 구매한 적도 있고, 고흐의 제수 요한나 반 고흐 봉허에게 “값은 부르는 대로 줄 테니 그림 전부를 달라” 했으나 거절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열정 덕에 고흐의 유화 97점과 스케치 185점으로 구성된 불후의 컬렉션이 탄생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 헬렌은 모든 소장품과 광활한 사유지를 국가에 기증했고, 1938년 국립 크뢸러뮐러미술관이 들어섰다. 이곳은 ‘고흐의 두 번째 집’으로 불린다.
빈센트 반 고흐 '밤의 카페 테라스'(1888). /크뢸러뮐러미술관
찰스 사치(1943~)
영국 현대미술의 대표 주자 ‘yBa’(young British artists) 그룹을 발굴·지원해 런던을 일약 미술계의 중심으로 밀어올린 수퍼 컬렉터.
광고업으로 거부(巨富)가 된 그는 특히 젊고 실험적인 작품을 집중적으로 구입해, 1985년 자신의 이름을 딴 ‘사치갤러리’에서 적극 소개했다. 사치의 공격적 투자 성향은 미술품 수집에도 적용됐다. ‘yBa’ 흥행을 촉발한 1988년 전시 ‘프리즈(Freeze)’에 참여한 학생 작가 16인의 파격적 작품을 대거 구입해 충격을 안겼고, 1997년 자신의 소장품으로 기획한 전시 ‘센세이션(Sensation)’으로 관람객 28만여명을 모으는 흥행 신화를 쓰기도 했다.
황금주 발굴에도 탁월했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악동'으로 이름을 날린 영국 작가 데이미언 허스트(56)일 것이다. 특히 방부 처리한 실제 상어를 수조 안에 집어넣은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이라는 제목의 엽기적 설치 작품은 사치의 후원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사치는 1991년 제작비 5만파운드(약 8000만원)를 대고 이 작품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2004년 한 미국 컬렉터에게 100억원 가까운 가격에 판매해 경이적인 수익률을 올렸다고 한다.
데이미언 허스트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1991). /ⓒDamien Hirst and Science Ltd
세르게이 슈킨(1854~1936)
슈킨의 컬렉션은 ‘모던 아트의 백과사전’으로 불린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 현대미술의 세계적 흐름을 선도한 전위예술의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부유한 기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슈킨은 미술품 수집이 취미인 형제들을 따라 유럽을 오가며 그림 보는 법을 배웠다. 이후 인상파·입체파 등 현대미술의 세계적 흐름을 선도한 작품 258점을 모아 자신의 모스크바 저택을 장식했다. 그의 컬렉션을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약 9조원에 달한다는 추산도 나온다. 그는 1908년쯤부터 6년간 일요일마다 저택을 시민들에게 무료 개방해 관람 기회를 제공했다.
‘야수파’의 창시자 앙리 마티스(1869~1954)를 특히 사랑했다. 마티스 대표작 ‘춤Ⅱ’는 슈킨이 마티스에게 직접 제작 의뢰해 탄생한 그림이다. 손을 맞잡고 춤추는 다섯 명의 붉은 나체가 파란 하늘과 초록의 풀밭을 배경으로 빛의 삼원색을 구성하는 대작이다. 슈킨은 ‘춤’과 한 쌍을 이룰 그림 ‘음악’도 의뢰해 벽에 걸었다. 마티스는 그에 대해 “결코 오판하지 않는 눈을 지녔다”고 평했다. 다만 러시아 혁명 이후 국가는 슈킨의 컬렉션을 공공 재산으로 몰수해버렸다. 프랑스로 도피한 그는 숨을 거둘 때까지 다시는 작품을 사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컬렉션은 현재 푸시킨미술관, 에르미타주미술관에 소장돼있다.
앙리 마티스 '춤II'(1910). /에르미타주미술관
오하라 마구사부로(1880~1943)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관이자 최초의 사립 미술관, 오하라미술관의 설립자. 일본 최고의 수집가로 손꼽히지만 ‘오하라 컬렉션’ 구축에는 친구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오카야마현 작은 항구 도시 구라시키에서 방적(紡績) 사업으로 갑부가 된 오하라는 일본이 세계 미술로부터 소외돼 있다고 생각했고, 친구이자 화가인 고지마 도라지로를 1908년부터 세 번에 걸쳐 유럽으로 유학을 보내 현지에서 미술을 공부하며 서양 작품을 수집하도록 지원했다. 고지마의 재능과 안목을 전적으로 신뢰한 오하라는 작품 수집에 관한 모든 권한을 친구에게 위임했고 유학 경비도 아낌없이 후원했다.
친구를 위해 고지마는 프랑스 화가 에드몽 아망 장에게 자문하며 ‘수련' 연작의 클로드 모네(1840~1926) 자택까지 직접 찾아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엘 그레코·고갱·샤갈·르누아르…. 빛나는 유럽의 걸작들이 일본 소도시까지 흘러들어 올 수 있었던 연유가 여기에 있다. 1929년 고지마가 세상을 떠나자 오하라는 이듬해 심각한 불황에도 오하라미술관을 개관했고, 고지마의 작품을 위한 전시관도 지었다. 우정과 예술 혼이 깃든 이곳은 극동의 작은 루브르박물관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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