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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미술/서양 미술사

반 고흐의 전설을 완성한 여인… “위대한 작가는 만들어진다”

by 주해 2022. 12. 5.

생전의 반 고흐는 동생 테오와 요한나 사이에 태어날 조카의 탄생을 미리 축하하며 봄의 희망과 설렘을 담은 그림 ‘아몬드 나무'(1890·왼쪽 큰 그림)를 그렸다. 큰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조카 빈센트는 83세에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개관 테이프를 잘랐고, 5년 뒤 사망할 때까지 매일 미술관에 출근했다. 캔버스에 유채, 73.3cm x 92.4cm, 암스테르담 반고흐 미술관 소장.

빈센트 반 고흐는 전 세계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화가다. 그의 비극적 생애가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예술가는 사후에 비로소 명성을 얻는 존재라고 여긴다. 이건 모두에게 통용되는 생각일까?

반 고흐를 세계적인 작가의 지위에 올려놓은 숨은 공로자는 그의 동생 테오가 아니라 실은 테오의 아내 요한나 반 고흐 봉허(1862~1925)다. 고흐에게는 제수씨가 되는 셈이다. 1890년 고흐가 37세의 이른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형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동생 테오도 6개월 뒤 33세의 젊은 나이에 과로와 죄책감으로 병사하고 말았다.

이제 남은 사람은 막 돌이 된 갓난아기를 둔 새댁 봉허다. 막막한 상황이었을 텐데 그녀는 주저앉는 대신 고향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와 하숙을 치며 생계를 잇기 시작했다. 밝고 활기찬 성격의 여성이었다지만, 갓난아기를 데리고 그 많은 그림을 옮기는 이사도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이런 결심을 하지 않았을까? 미래의 아들에게 “너의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었다”고, 그리고 “네 아버지가 정성껏 후원한 큰아버지는 이렇게 훌륭한 예술가였다”고 말해야겠다고. “그 위대한 화가가 너의 탄생을 축하하며 그려준 그림이 ‘아몬드 나무’”라고 말이다. 파란 배경에 연둣빛 줄기가 그려진 작품은 조카의 탄생을 기다리며 봄의 희망과 설렘을 담은 작품이다. 그 마음을 관객들도 알아보는 것 같다. 이 작품은 ‘해바라기’와 함께 고흐의 작품 중 가장 인기 있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왼쪽 사진은 '요한나 봉허의 초상'(1889), 사진 우드베리 & 페이지. 오른쪽 그림은 화가였던 봉허의 두번째 남편 요한 코헨 고스잘크가 그린 '요한나 봉허의 초상'(1905), 분필 및 수채화. /위키피디아

봉허는 젊은 시절 영어 선생님이자 번역가로 활동했던 실력을 발휘해 남편이 시아주버님과 나눈 프랑스어 편지를 네덜란드어와 영어로 번역했다. 또한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훗날 아들이 알 수 있도록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생전에 고흐에게 우호적이었던 예술가들과도 교류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한 미술 평론가는 ‘매력적인 숙녀인데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눈물이나 질질 짜게 하는 그림에 맹목적으로 몰두해서 짜증이 난다’는 평을 남기기도 했으니, 고흐의 그림을 알리는 과정이 얼마나 지난했을지 짐작이 간다. 다행히도 차츰 고흐의 작품을 알아보는 이들이 생겨났고, 드디어 1905년 암스테르담 스테델레이크 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젊은 예술학도였던 몬드리안을 비롯해 여러 예술가들이 이 전시회를 보고 화려한 색채를 과감하게 쓰는 방향으로 화풍을 바꾸었고, 생전 단 한 점 팔렸던 500프랑짜리 그림은(현 시세로 약 250만원) 전시 이듬해 무려 20배에 달하는 1만 프랑(약 5000만원)에 팔렸다. 영국 내셔널갤러리에서도 독일에서도 반 고흐의 작품을 사러 왔고, 베를린에서도 반 고흐의 전시회를 기획했다. 반 고흐의 작품을 유독 좋아한 독일계 예술품 컬렉터 크뢸러 뮐러(Kröller-Müller) 부부는 부르는 대로 값을 줄 테니 모든 작품을 넘기라는 제안도 했다. 이들은 훗날 평생 모은 작품을 네덜란드에 기증하여 1938년 미술관을 설립하는 데 반 고흐의 작품 다수가 소장되어 그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봉허는 돈을 목적으로 한 제안은 단호히 거절하고 고흐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최소한의 작품만을 미술관에 판매하며 컬렉션을 지켜나갔다. 남편의 무덤도 네덜란드에서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있는 고흐의 옆자리로 옮겼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반고흐 미술관 외관. 네덜란드 건축가 헤릿 리트펠트와 일본 건축가 기쇼 구로카와 공동 건축. 사진 Jan Kees Steenman, ©암스테르담 반고흐 미술관

1925년 봉허가 62세로 세상을 뜨자, 그녀의 노력은 아들로 이어졌다. 큰아버지와 같은 이름의 빈센트 빌럼 반 고흐다. 아들은 어머니가 마치지 못한 번역을 이어갔고 두 형제의 예술혼을 알리는 데 혼신을 다 바쳤다. 드디어 1962년 암스테르담 시는 반 고흐 전문 미술관을 짓기로 결정한다. 반 고흐의 팬이 유독 많은 일본의 솜포재팬 보험사가 후원자로 나섰고, 1973년 미술관이 완성되었다. 1890년 반 고흐가 사망하던 해 태어난 어린 조카는 여든세 살이 되어 개막식 테이프를 잘랐고, 5년 뒤 사망할 때까지 매일 미술관에 출근했다. 아몬드 나무가 전달한 사랑이 피운 꽃이다.

반 고흐를 위대하게 만든 봉허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감동 이상의 깨달음을 준다. 우선 예술가의 명성은 별세한 뒤에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가족이나 재단 등 작품을 지속적으로 당대와 연결시키려 노력하는 주체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작가 중에서도 김환기나 이응로 등의 작품을 잘 지켜온 사립미술관의 활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또 월북 화가 이쾌대의 작품을 조심스레 지켜온 유족의 노력이 새삼 대단해 보인다. 서울 평창동과 성북동 일대에 작고 예술가를 기리는 ‘미술관 밸리’가 생겨날 예정이라는 최근 소식은 그래서 더욱 반갑다. 반면 생전에 어느 예술가 못지않은 명성을 얻었던 백남준이 일본 유족과의 갈등 등으로 생전만큼의 명성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위대한 작가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고흐의 작품을 ‘눈물이나 질질 짜게 하는 그림’이라고 혹평했던 평론가의 말처럼, 고흐와 동생이 주고받은 편지는 생의 모든 것에서 실패했던 한 남자가 예술가가 되어간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반 고흐 미술관이 연간 200만명이 넘게 방문하는 인기 미술관이 된 것도 바로 그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단일 작가의 미술관임에도 네덜란드 최고의 입장객 수를 기록하고, 세계 랭킹에서도 입장객 집계 30위권 안에 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넓지도 않은 국토가 해수면보다 낮은 네덜란드에서, 반 고흐와 같은 문화 콘텐츠는 마르지 않는 화수분과 같다. 형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 여기에 더해진 봉허의 스토리는 최근의 페미니즘 무드에 걸맞은 또 다른 문화 콘텐츠로도 손색이 없다. 고흐에 대한 새로운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봉허의 인생에 초점을 둔 여성주의 영화여도 좋을 것이다.

반고흐 자화상이 걸려있는 미술관 내부. 사진 Jan Kees Steenman, ©암스테르담 반고흐 미술관

반고흐 미술관에서 아기에게 작품을 설명해주는 엄마. 사진 Jan Kees Steenman, ©암스테르담 반고흐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