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21 08:35:05
스페인 독감에서 살아남은 화가
에드바르 뭉크, 스페인 독감에 걸린 자화상, 오슬로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 소장.
핏기 없는 얼굴, 푸르스름하게 자라난 수염, 움푹 꺼진 눈자위에 힘없이 입을 벌려 긴 한숨을 내쉬는 이는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1863~1944)다. 무거운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서 겨우 일어나 가운과 담요로 온몸을 둘둘 말고서 의자에 앉은 화가는 지금 격리된 채 스페인 독감을 앓는 중이다. 눈동자마저 희미하게 사라진 그의 얼굴에서는 질병으로 고통받다 이제 더 이상 이겨낼 의지나 기운 따위가 전혀 남지 않은 자포자기의 심정이 느껴진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이 와중에도 자화상을 그렸고, 의외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1918년 발생해 2년간 전 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은 14세기 중반 흑사병의 뒤를 이어 역사상 둘째로 많은 사망자 수를 기록한 전염병이다. 뭉크 나이 또래였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도, 훨씬 젊었던 에곤 실레도 모두 1918년에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게다가 뭉크는 천성적으로 병약해 어릴 때부터 학교와 병상 사이를 수시로 오고 갔으니 그가 스페인 독감에서 생존한 건 지극히 의외라고 할만하다. 어릴 때 어머니와 누나를 모두 결핵으로 잃었고, 그나마 성인이 된 동생들도 모두 성치 않았던 탓에 그는 ‘병마와 광기와 죽음이 내 요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고 회고했을 정도로 줄곧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살았다. 그 유명한 ‘절규’에서 핏빛 하늘 아래 검은 구멍처럼 뻥 뚫린 입으로 소리치는 해골 같은 남자의 일그러진 얼굴은 다름 아닌 뭉크 자신이었던 것이다.
불안과 우울에서 벗어나고자 알코올에 의존하기도 했던 뭉크가 자신감을 갖고 안정을 찾게 된 건 독감에서 살아남은 다음이었다. 그는 엄청난 숫자의 작품을 남기고 여든을 넘기도록 장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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