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필립 심프슨, 사로잡힌 노예, 1827년, 캔버스에 유채, 127×101.5㎝,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 소장.
영국 화가 존 필립 심프슨(John Philip Simpson·1782~1847)은 런던의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했다가 당시 아카데미 원장이던 초상화가 토머스 로런스의 조수가 됐다. 로런스는 영국 여왕과 국왕, 교황을 비롯하여 당대 최고 권력층의 초상화를 독점하다시피 했던 최고 화가였다. 그 덕에 심프슨도 귀족들에게 초상화 주문을 받아가며 여유 있는 삶을 살았지만,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기술은 뛰어나되 그림에 영혼이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영혼이 담긴 그림, 심프슨의 이름을 역사에 남긴 그림은 딱 하나 바로 이 '사로잡힌 노예'이다. 수갑을 찬 채 차가운 벤치에 앉아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을 기다리는 흑인 노예의 모습이다. 어두운 배경 속에서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을 향해 고개를 든 남자 얼굴에는 체념과 우수가 깃들어 있지만, 여전히 단정한 몸짓과 당당한 체구, 깊은 눈빛에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품위를 지키려는 고귀한 한 인간의 의지가 드러난다. 만약 이 그림이 성당에 걸려 있었다면 믿음을 위해 순교를 선택하고 신에게 영혼을 맡긴 성인의 초상화로 보였을 것이다.
심프슨은 다른 그림을 그리다 만 캔버스를 재활용하여 그 위에 덧칠하고, 당시 흑인으로 유일하게 연극 무대에 오르던 배우 아이라 올드리지를 모델로 이 그림을 그렸다. 고관대작의 주문을 받은 게 아니라 순전히 자기 의지로 그린 것이다. 당시 영국에서 노예무역은 금지되었지만 노예제가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노예 폐지론자로서 심프슨은 이 그림을 전시하며 시 한 구절을 함께 실었다. '절망의 화물로 부유한 상인에게 어떤 기도가, 어떤 소망이 번창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