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버른·애들레이드·퍼스
호주 3개 도시 3색 여행
호주 빅토리아주 야라밸리에 있는 ‘도메인 샹동’ 와이너리 앞 포도밭이 노랗게 물들었다. 남반구인 호주에선 지금이 가을의 절정이다. /남정미 기자
오월의 호주는 거리마다 단풍이었다. 인천에서 호주 시드니까지 비행기로 10시간 30분 날아갔을 뿐인데, 가을이 반칙하듯 끼어들었다. 포도나무도 가을이면 노랗게 물든다는 걸 처음 알았다. 호주 최고 화이트 와인 산지 ‘애들레이드 힐스’ 주변을 지날 때였다. 끝없이 펼쳐지는 노란 물결 너머 한 무리의 야생 캥거루가 뛰어 지나갔다. 애들레이드 힐스에 불어오는 바람에는 포도나무만 안다는 바다 내음이 실려 있다.
호주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 ‘방역 요새’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강력한 봉쇄 정책을 취했다. 지금은 ETA 비자에, 영문 백신 접종 증명서와 전자입국신고서(DPD)만 갖추면 누구든 여행할 수 있다. 호주는 한국보다 국토가 70배 이상 넓다. 같은 나라인데도 도시의 경계가 바뀔 때마다 풍경과 건축과 음식과 와인이 달라졌다. 호주 3개 도시, 멜버른·애들레이드·퍼스를 다녀왔다.
◇멜버른 골목에서 플랫 화이트 한 잔
멜버른 골목에서라면 길을 잃어도 좋다. 골목마다 개성 넘치는 카페와 가게들이 넘쳐 나기 때문이다. 멜버른 도심에 있는 ‘호시어 레인(Hosier Lane)’에선 길을 잃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골목을 가득 채운 그라피티는 한 번도 같은 모습인 적이 없다. 우리에겐 ‘미사 거리’로 더 익숙한 곳. 2004년 방영된 KBS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배우 임수정이 소지섭과 함께 쪼그려 앉아 있던 바로 그 거리다. 멜버른의 상징이라는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에 내려 5분 정도 걸으면 호시어 레인이 시작된다. 담장, 건물 외벽뿐 아니라 배수관, 쓰레기통까지 이곳에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예술의 대상이다. 영국의 유명 그라피티 예술가 뱅크시(Banksy)의 벽화가 청소팀의 실수로 지워진 일화도 유명하다.
멜버른 ‘호시어 레인’에는 매일 새로운 그라피티가 그려진다. /빅토리아주 관광청
그라피티 하면 떠오르는 ‘뒷골목’ 이미지와 달리 ‘호시어 레인’ 주변은 세련된 상점과 식당으로 가득하다. 요즘 멜버른 미식의 키워드는 ‘멀티컬처(다문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다문화 국가답게, 각국의 전통 요리에서 영감을 받은 퓨전 음식점이 많다. 태국 음식에 호주의 식재료를 접목한 ‘친친’, 일본 음식이 토대가 된 ‘수퍼 노멀’ 등이 대표적. 혹 캥거루 부르기뇽, 에뮤 스테이크 등 호주에서만 즐길 수 있는 독특한 음식을 맛보고 싶다면 ‘마부마부’로 가면 된다.
버터 카레 등 호주식 퓨전 태국 요리를 만날 수 있는 멜버른 ‘친친'. /친친
멜버른 도심에서 차로 20여 분 떨어진 ‘브런즈윅 스트리트(Brunswick St)’는 젊은 예술가들과 창업가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가난한 이민자들이 모여 살았던 우범 지대는 렌트비가 저렴하고 개발이 덜 됐다는 점에서 오히려 기회의 공간이 됐다. ‘인더스트리 빈스(Industry Beans)’도 그중 하나. 20대 형제 창업가가 2010년 이 거리의 창고에서 시작한 커피 전문점은 지금 호주 전역에 7개 매장을 두고 있다. 인더스트리 빈스를 창업한 트레버 시먼스는 “멜버른 사람들은 정형화된 커피 맛보다는 소규모의 독창적인 커피 전문점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한다”며 “멜버른에선 외국인만 스타벅스 커피를 마신다”고 했다.
멜버른 한 창고에서 시작한 ‘인더스트리 빈스’는 이제 멜버른을 대표하는 커피 전문점이 됐다. /남정미 기자
실제 멜버른에는 2000여 개 이상의 크고 작은 독립 카페가 있다. 컵까지 먹을 수 있는 퍼즐 커피, 아보카도 토스트 등 호주식 브런치를 함께할 수 있는 코드 블랙 커피가 유명하다. 진한 에스프레소에 부드러운 우유 거품을 얹는 ‘플랫 화이트’, 뜨거운 물에 에스프레소 샷 두 잔을 더 한 ‘롱 블랙’의 원조가 호주인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브런즈윅에선 크루아상 전문점 ‘룬(lune)’도 놓쳐선 안 된다. 2016년 뉴욕타임스가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크루아상’이라고 평가한 곳이다.
◇애들레이드에선 어디든 20분이면 바다로 간다
애들레이드에선 어디에 살아도 차로 20분이면 바다에 닿을 수 있다. 포트 윌룽가(Port Willunga)는 그중에서도 애들레이드 사람들이 사랑하는 해변이다. 깎아지른 절벽과 유리 구슬보다 맑은 바다, 밀가루처럼 고운 백사장에선 누구든 어린아이가 된다. 일몰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해지는 바닷가엔 절벽과 모래와 파도 소리 외엔 아무것도 없어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지구의 자전이 빚어내는 장관을 느낄 수 있다.
남호주 애들레이드 포트 윌룽가의 일몰. /남정미 기자
포트 윌룽가 인근의 해산물 레스토랑 ‘스타 오브 그리스’는 이 바다에 1888년 침몰한 화물선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난파선 일부는 여전히 바닷속에 남아있어 스쿠버 다이빙의 성지가 됐다. 윌룽가 인근 셀릭스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빅토리 호텔’에서의 저녁도 좋다. 1853년 지어진 빌딩을 복원해 레스토랑으로 만든 곳으로, 신선한 지역 식재료로 만든 음식과 와인 리스트가 훌륭한 곳이다.
고지대에 있는 ‘마운트 로프티 하우스’에선 멀리 포도밭을 내려다보며 와인을 마실 수 있다. /마운트 로프티 하우스
이 지역 식당의 와인 리스트가 훌륭한 건 인근에 유명 와인 산지 ‘애들레이드 힐스’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와이너리 수십 개가 몰려 있어, 직접 양조 과정을 보고 시음할 수 있다. 호주 최초 와인 마스터 마이클 힐 스미스와 그의 사촌 마틴 쇼가 만든 ‘쇼앤드스미스’ 와이너리도 이곳에 있다.
와인이 아니더라도 고지대 특유의 자연 경관은 애들레이드 힐스를 방문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1852년 ‘호주의 위대한 개츠비’로 불리는 아서 하디가 이곳에 여름용 별장을 짓고 초호화 파티를 연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일 터. 지금은 ‘마운트 로프티 하우스’라는 이름의 고급 부티크 호텔로 변신했다.
애들레이드 ‘맥라렌 베일’에 위치한 다렌버그 와이너리. 큐브 모양의 독특한 외관과 뛰어난 경관으로 와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즐겨 찾는다. /다렌 버그
인근 맥라렌 베일에 있는 다렌버그(d’Arenberg) 와이너리는 큐브 모양 외관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곳에선 시라즈와 그레나슈 와인이 일품이다. 와인메이커 체스터 오스번은 “와인은 결국 땅이 빚는 것”이라며 “이 땅을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물려주기 위해 포도 재배부터 발효까지 와인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유기농법과 친환경 방식으로 한다”고 했다.
‘클리랜드 와일드라이프 공원’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10만평 넘는 부지에 코알라·캥거루·웜뱃 등 130여 종의 야생 동물이 철창과 우리 없이 뛰어노는 곳이다.
‘클리랜드 와일드라이프 공원’에선 코알라 안기 체험이 가능하다. /남정미 기자
◇고립된 여유... 호주인들의 휴양지 ‘퍼스’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심 공원인 ‘킹스 파크’에서 퍼스 사람들은 그저 잔디밭에 눕거나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린다. 퍼스는 호주 사람들도 휴가를 보내기 위해 찾아오는 곳. 골드 러시로 탄탄하게 기반을 다진 이 도시 서쪽엔 인도양이, 동쪽으로는 끝없는 사막이 이어진다. 이런 고립 속에서 퍼스는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간다. 퍼스만의 ‘고립된 여유로움’이다. 도시 곳곳을 감싸 안으며 흘러가는 스완 강을 바라보면 그 느긋함이 이해된다.
퍼스 근교의 항구 도시 프리맨틀(Fremantle)에선 실제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초기 정착민들이 거주했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프리맨틀 교도소와 간수들의 숙소가 대표적이다. 1890년대 처음 개장한 ‘프리맨틀 시장’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퍼스에서 기차를 타고 30분 정도면 도착하는 곳으로, 퍼스 사람들도 주말이면 브런치를 먹으러 온다.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자리를 많이 잡은 이 항구에선 바다 냄새보다 커피 냄새가 더 진하게 난다. ‘카푸치노 거리’가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