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조건없이 내놓다… 개성 갑부집안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의 최고 걸작인 국보 제180호 '세한도(歲寒圖)'가 국민의 품으로 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91)씨가 대를 이어 소중히 간직해온 '세한도'를 아무 조건 없이 기증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19일 밝혔다. 배기동 관장은 "손 선생이 컬렉션 304점을 지난 2018년 전부 기증하면서 마지막까지 고심하다가 '세한도' 한 점만은 아직 안 되겠다 했던 건데 지난 늦봄 아주 큰 결심을 해주셨다"며 "평생 자식보다 더 귀하게 아낀 작품"이라고 했다.
국보 제180호 '세한도'. 집 한 채를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룬 간결한 그림이지만, 유배의 시련을 이겨내려는 추사 김정희의 곧은 정신이 서려 있다. 종이에 수묵, 23.7×109㎝.
국보 중의 국보라 할 '세한도'는 1844년 58세의 추사가 유배지 제주도에서 그린 그림이다. 귀양살이하는 자신을 잊지 않고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에서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에게 답례로 '날이 추워진(歲寒)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도록 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글과 함께 그려 보냈다. 작품은 그해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이상적을 따라 중국을 여행했고, 1943년엔 일본인 주인을 따라 바다를 건너가기도 했다. 1944년 컬렉터 손재형의 노력 끝에 극적으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이후에도 주인은 계속 바뀌었다. 결국 개성 갑부였던 실업가 손세기(1903~1983)가 수집했고, 아들 손창근씨가 대를 이어 소장해오다 2011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한 바 있다.
◇개성 출신 부자(父子)의 대 이은 나눔
손창근씨는 2018년 기증식에서 "죽을 때 가져갈 수도 없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박물관에 맡기기로 했다"고 말했다. "귀중한 국보급 유물을 저 대신 길이길이 잘 보관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저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다"며 기증 의사를 먼저 밝혀왔다고 한다. 당시 손씨가 기증품에서 딱 하나 제외했던 게 바로 '세한도'. 이원복 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은 "손 선생이 '아무래도 섭섭하고 허전해서 안 될 거 같다' 하며 뺐지만, 애초 박물관에 기탁할 때부터 결국 다 기증하고 떠나겠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지난 2018년 기증식에 참석한 손창근씨 부부.
손세기 선생은 일찍이 고향 개성에서부터 인삼 무역과 재배에 종사한 실업가였다. 아들 손씨는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뒤 공군으로 예편했고, 1960년대 외국인 상사에서 근무한 후 사업에 매진했다. 배 관장은 "소장품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신념을 갖고 사신 분"이라고 했다.
부자(父子)의 기부는 처음이 아니다. 손세기 선생은 생전인 1974년 서강대에 고서화 200점을 기증했다. 이어 선친의 정신을 계승한 손씨는 2008년 국립중앙박물관회에 연구 기금으로 1억원을 기부했다. 2012년에는 경기도 용인의 산림 약 200만평(서울 남산의 2배 면적)을 국가에 기증했다. 50년 동안 잣나무·낙엽송 200만 그루를 심고 분신처럼 가꿔온 땅이다. 당시 산림청 직원들은 시가 1000억원에 달하는 땅을 아무 조건 없이 내놓은 손씨의 얼굴도 몰랐다. "그래도 선생님의 선행을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산림청 직원 말에 "아들딸도 내 뜻에 선뜻 동의했다는 것만 알려 달라"고 했다.
◇"세한도는 최소 100억원 이상의 가치"
'세한도'는 차가운 세월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 추운 시절에 더욱 따스하게 느껴지는 옛정, 역경을 이겨내는 추사의 꿋꿋한 의지를 극도의 절제와 생략으로 그려낸 문인화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전문가들은 "'세한도'의 가치를 굳이 돈으로 환산하자면 최소 100억원 이상"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원복 전 실장은 "한·중·일 삼국의 명망가들이 감탄한 명작인 데다 무한한 스토리를 품고 있는 '무가지보(無價之寶)'"라며 "1조원을 붙여도 손색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배 관장은 "작품 소유권을 온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의미를 새기기 위해 올 연말 '세한도' 특별전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20/2020082000140.html
10번 주인 바뀐 세한도, 하마터면 일본서 폭격에 사라질 뻔
'세한도'는 작품 자체의 사연도 절절하지만 이후 소장 과정에도 곡절이 많았다. 이 불후의 명작을 우리는 자칫하면 못볼 뻔했다. 최초 소장자인 역관 이상적이 세상을 떠난 뒤 '세한도'는 그의 제자였던 김병선을 거쳐 한말 권세가인 민영휘 집안으로 넘어갔다. 그 후 추사 연구에 일가를 이뤘던 경성제대 교수 후지스카 지카시(藤塚隣·1879~1948) 소유가 된다. 1943년 그가 이 그림을 갖고 일본으로 귀국하자, 서예가이자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컬렉터였던 소전 손재형이 이듬해 거금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도쿄는 밤낮없이 계속되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손재형은 후지스카의 집으로 찾아가 100일간 문안하며 '세한도'를 넘겨달라고 간청했다. 감복한 후지스카는 "결국 내가 졌다"며 돈도 받지 않고 '세한도'를 건넸는데, 석 달 뒤 후지스카 집은 폭격을 맞았다. 그가 소장한 상당수 책과 자료가 불타버렸지만 '세한도'는 극적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손재형이 귀국해 이 기쁜 소식을 알리자 위창 오세창은 이렇게 칭찬했다. "폭탄이 비와 안개처럼 자욱하게 떨어지는 가운데 어려움과 위험을 두루 겪으면서 겨우 뱃머리를 돌려 돌아왔다. 만일 생명보다 더 국보를 아끼는 선비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소전은 영원히 잘 간직할지어다."
하지만 뜨거운 열정으로 '세한도'를 찾아온 손재형은 1958년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돈이 부족해지자 소장품을 저당잡힌다. 결국 개성 갑부인 손세기의 소유가 됐고, 아들인 손창근씨에 의해 국민의 품에 안겼다. '세한도'의 11번째 주인은 국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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