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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화제의 유물

7세기 일본 불상 이름이 '백제관음'인 까닭은?

by 주해 2022. 11. 25.

2020-04-28 22:12:45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27/2020042704437.html

 

7세기 일본 불상 이름이 '백제관음'인 까닭은?

7세기 일본 불상 이름이 백제관음인 까닭은 도쿄국립박물관 특별전 위해 생애 두번째 외출한 호류지 불상 코로나 사태로 전시 취소돼 백제 불상이냐 일본 불상이냐 논란도 아름다운 건 백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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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국립박물관 특별전 위해
생애 두번째 외출한 호류지 불상
코로나 사태로 전시 취소돼
백제 불상이냐 일본 불상이냐 논란도
"아름다운 건 백제의 것이라는
일본 인식에 '백제관음' 이름 붙어"

일본 나라 호류지 '백제관음'. 높이 210cm. 팔등신 늘씬한 몸매, 정병을 살포시 쥔 왼손, 앞으로 내민 오른손의 손바닥 굴곡까지 유려한 걸작이다.
 

그는 지금 불 꺼진 전시실에 서 있다. 벌써 두 달째다. 2m 넘는 팔등신 몸매, 부드러운 얼굴, 천 자락을 발아래까지 내려뜨린 고혹적 자태를 잃지 않았다. 왼손엔 정병을 살포시 잡고 오른손은 앞으로 내민 채 입가에 머금은 미소. 프랑스 지성 앙드레 말로가 “일본 열도가 침몰할 때 단 하나만 가지고 간다면 이것을 택하겠다”고 찬탄했던 불상, 일본 국보 ‘백제관음’이다.

나라 호류지(法隆寺) 소장품인 이 불상은 지난 2월 말 23년 만에 도쿄에 왔다. 도쿄국립박물관 특별전 ‘호류지 금당벽화와 백제관음’을 위해서다. 원래 3월 13일 개막해 5월 10일까지 열릴 전시였다. 일본이 자랑하는 이 불상이 호류지 바깥으로 나온 건 두 번째. 1997년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처음 해외 전시됐고, 직후 도쿄·나고야·후쿠오카 등 일본 국내 6개 박물관을 순회했다. 그러나 ‘23년 만의 백제관음 외출’로 기대를 모았던 이번 전시는 코로나 사태로 개막도 못 하고 취소됐다.

    정병을 살포시 쥐고 있는 왼손. 손가락 곡선까지 세밀하게 표현했다.

 

          연화 좌대 위에 서있는 발끝 부분을 확대한 모습. 물결처럼 휘감아 올린 옷자락 끝에서 율동감이 느껴진다.
 

호류지에서 이 불상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흥은 대단했다. 높이 210㎝에 달하는 늘씬한 불상이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빛나고 있었다. 높이 솟은 불꽃 모양의 광배, 정병을 쥔 손가락의 곡선, 발끝에서 물결치는 옷자락…. ‘동아시아 미술의 보고(寶庫)’인 이 사찰에서도 압권은 백제관음이었다.

7세기 아스카(飛鳥) 시대 걸작이지만 '이름' 때문에 한동안 백제에서 건너간 작품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백제관음'이라 불린 건 불과 100년밖에 안 된다. 원래 이름은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 호류지 관장 다카다 료신 "언제 누가 만들어 어디에 안치했는지 기록이 없어 정확한 유래를 알 수 없다"며 "가장 오래된 기록이 1698년 작성된 것인데, 여기엔 허공장보살이 인도에서 만들어져 백제를 통해 건너왔다고 적혀 있다"고 했다.

                                          백제관음상이 1926년~1935년경 나라 호류지 금당에 안치된 모습.
 

이후 1911년 호류지 창고에서 보관(寶冠)이 발견된다. 보관 중앙에 관음보살의 상징인 아미타 화불이 표현돼 있어 애당초 이 불상이 관음보살상으로 제작됐음이 밝혀진 것이다. 게다가 이 시기 일본 학자들은 이 특이하고 이국적인 불상을 '조선 양식'이라고 봤다. 1917년 발간한 '호류지대경'에 처음 백제관음이란 호칭이 등장하고, 1919년 철학자 와쓰지 데쓰로(1889~1960)가 쓴 '고사순례'에 '우리 백제관음상'이란 표현이 쓰이면서 유명해졌다.

 백제관음의 얼굴 부분을 확대한 모습. 머리에 드리운 투조 보관 중앙에 아미타 화불이 표현돼 있다.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오른손.


하지만 연구가 진척되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1971년엔 일본의 목재 전문가가 불상의 재료가 녹나무[樟木]임을 밝혔다. 녹나무는 일본 고대 목조 조각에서 흔히 쓰이지만, 한국에선 제주 외엔 자라지 않아 백제 조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네다치 겐스케 교토대 교수도 "백제관음은 상 전체를 녹나무 한 그루를 조각해 만들었고, 왼손에 쥔 정병만 편백나무[檜木]를 사용했다"며 "아스카 시대 불상은 대부분 녹나무로 만들었다"고 했다.

한국 학계에선 견해가 엇갈린다. 강희정 서강대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줬다는 오해는 일본에서의 이후 연구 성과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독립 이전 견해가 답습됐기 때문”이라며 “백제관음은 남조-백제를 거쳐 일본에 전해진 불상 양식의 일면을 보여주지만, 이걸 백제인이 했느냐는 건 다른 문제다. 무엇보다 이 불상과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백제불상은 없다. 기준이 되는 상이 없는 채 백제에서 건너갔다거나 백제인이 만들었다고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반면 주수완 우석대 교수는 “재료가 녹나무라는 것이 일본에서 만든 불상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한국에 지금 녹나무가 없다고 해도 삼국시대에 식생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며 “양식적으로도 일본 아스카 시대엔 백제관음과 닮은 불상이 없지만, 백제 불상 중엔 부여 규암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상처럼 극도로 가늘고 길게 인체를 강조한 불상이 종종 발견된다. 백제관음은 백제 장인의 작품일 수도, 백제에서 간 도래인이 만든 불상일 수도 있으며, 백제의 영향을 받아 만든 일본 불상일 수도 있다”고 했다.

민병찬 국립경주박물관장은 “‘백제관음’이란 명칭을 일본에서 부여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일본에선 예부터 좋고 아름다운 건 ‘구다라(백제)’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며 “국적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당시 한·일 양국이 그만큼 긴밀하게 문화적 유대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 문화 교류 차원에서 연구가 진척돼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 나라 호류지 백제관음상의 정면. 불꽃 모양의 광배가 선명히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