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의 아내’로 묻혔던 박래현
시대가 원하는 ‘현모양처’상에 화합하며 일과 가정에 안간힘
하지만 그는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달려간 예술가였다
우향 박래현의 추상 작품 ‘영광’(1966~1967). /국립현대미술관
봄날 주말, 청주 나들이에 나선 건 오로지 이 전시 때문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서 열리는 ‘박래현, 삼중통역자’(5월 9일까지). 지난해 서울 덕수궁관 전시를 놓쳐서 아차, 하다가 곧 청주로 내려간다는 걸 알고 벼르던 참이었다.
전시는 그간 ‘운보 김기창의 아내’라는 이름 아래 묻혔던 화가 박래현(1920~1976)의 작품 세계를 한껏 펼친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연상케 하는 그의 초기작 ‘노점’이 전부터 좋았다. 맑은 색상과 기하학적으로 분할한 색면, 이토록 세련되고 모던한 그림이 전쟁 직후인 1956년에 나왔다. 하지만 내가 얄팍하게 알고 있던 박래현은 여기까지. 그가 비슷한 시기에 남편과 함께 그린 합작품 ‘봄C’는 호방한 필선과 무르익은 자신감을 뿜어낸다. 굵은 등나무의 둥치를 박래현이 먼저 그린 후 김기창이 가지에 앉은 참새를 그렸다.
박래현과 김기창이 1956년경 합작해 그린 '봄C'. 아라리오컬렉션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시기별 변곡점을 찍으며 그의 작품은 진화를 거듭한다. 이 모든 게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다. 1960년대 초반 형체를 지우고 색으로 에너지를 분출한 추상화 작업부터 박래현의 진가가 본격 발휘된다. 구불거리는 황금빛 띠에 가득 찬 생명력과 동양화 특유의 먹물 번짐 기법이 결합해 마치 수공예자가 짜낸 직물 같은 추상 회화를 만들어냈다. 쉰 나이에 떠난 미국 유학에선 판화라는 낯선 매체에 도전한다. “평소 화선지의 한계에서 벗어나 보려던 나에겐 구체적으로 손에 잡혀 표현되는 여러 판화 기술이 매혹적이었다”는 고백에서 새로운 기법을 만나 요동치는 예술가의 심장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박래현은 시대와 불화하지 않았다. 전시장엔 당시의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에 맞추려는 안간힘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침 6시쯤 일어나 기저귀 빨기, 밥 짓기, 청소하기, 아침 식사가 끝나면 이것저것 치우고… 정오면 점심 먹고, 저녁 먹고 곤해서 좀 쉬는 동안에 잠이 들면… 본업인 그림은 언제나 그리나.” 결혼 직후인 1948년 잡지에 쓴 수필에서 화가이자 아내, 엄마로서의 고충이 배어난다.
미국 유학 시절 판화 공방에서 작업 중인 박래현. /국립현대미술관
박래현이 국전을 통해 화단의 정상에 선 뒤에도, 세상은 청각 장애가 있는 남편에게 구화(口話)를 가르치고 네 자녀를 훌륭하게 양육한 ‘여성의 거울’로 그를 조명했다. 1962년 한 잡지사가 청탁한 글의 제목이 ‘남편 시중기’. 가족을 두고 7년간이나 미국 유학을 다녀온 그가 귀국하자마자 ‘신사임당상’의 주인공이 됐다는 건 황당하기까지 하다. ‘예술하는 현모양처’라는 굴레를 씌우고 싶었던 게다.
하지만 작품 세계에 있어서는 그는 타협하는 예술가가 아니었다. 시간을 쪼개고 30평 남짓한 화실을 남편과 나누어 쓰며 작업에 몰두했다. 한 방에서 펼쳐지는 두 개의 세계.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무서운 대결”이라고 박래현은 표현했다. 1974년 귀국 판화전에서 발표한 작품들은 초보 단계에 머물던 한국 판화계에 새로운 시야를 열어줬다. 그것은 ‘미래의 박래현’을 예고하는 팡파레처럼 강렬했지만, 그의 붓은 급작스레 꺾인다. 쉴 틈 없던 쉰여섯 생을 멈춰세운 건 간암이었다. “확실히 그녀는 과로했다. 아내, 어머니, 예술가의 ‘삼중의 삶’은 그의 ‘삼중 통역’과 마찬가지로 너무 버거운 것이었다.”(모윤숙)
미국에서 귀국한 박래현의 말년작 '어항'. 개인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일과 가사, 내조와 육아를 모두 잘 해내려 분투했던 고단한 생이 짠하면서도, 그가 스스로 이뤄낸 성취에 울컥해졌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거장 남편이 독차지한 스포트라이트 옆 ‘누구의 아내’라는 굴레가 없었다면 화가 박래현의 위상은 지금쯤 어느 자리에 매김해 있었을까. 우리는 이 빛나는 예술가를 너무 빨리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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