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태준과 화가 김용준
“내 글 선생이 누구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는데 말이에요. 사실 누구한테 글쓰기를 배운 적은 없어요. 그래도 누군지 말하라고 한다면, 이태준(1904~?)이라고 할 수 있죠. 이태준의 ‘문장강화’. 그 책이 아직 금서(禁書)일 때 인사동 통문관 사장님한테 빌려서 몰래 읽었거든요.”
얼마 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전시를 보러 온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한 말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최고 베스트셀러 작가의 글쓰기 교본이 이태준의 ‘문장강화’라니. 하기야 1930~1940년대에는 다들 “시는 지용(정지용), 문장은 태준(이태준)”이라 하지 않았나.
◇수백 번 퇴고한 이태준의 문장
수능 문제집에서 별 다섯 개가 붙은 지문, 이태준의 수필 ‘고완(古玩)’을 읽어보자.
“우리 집엔 웃어른이 아니 계시다. 나는 때로 거만스러워진다. 오직 하나 나보다 나이 더 높은 것은, 아버님께서 쓰시던 연적이 있을 뿐이다. 저것이 아버님께서 쓰시던 것이거니 하고 고요한 자리에서 쳐다보면 말로만 들은, 글씨를 좋아하셨다는 아버님의 풍의(風儀)가 참먹 향기와 함께 자리에 풍기는 듯하다. (중략) 우리 조선 시대의 공예품들은 워낙이 순박하게 타고나서 손때나 음식물에 절수록 아름다워진다. 도자기만 그렇지 않다. 목공품 모든 것이 그렇다. 목침, 나막신, 반상(飯床). 모든 생활 속에 들어와 사용자의 손때가 묻을수록 자꾸 아름다워지고, 서적도 요즘 양본(洋本)들은 새것을 사면 그날부터 더러워만지고 보기 싫어지는 운명뿐이나, 조선 책들은 어느 정도 손때에 절어야만 표지도 윤택해지고 책장도 부드럽게 넘어간다.”
그의 글은 참 부드럽게 넘어간다.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렇게 자연스러워 ‘보이기’ 위해, 이태준은 수십 번 수백 번 끝까지 문장을 고쳐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문장강화’에 썼듯이, 문장에서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 들어가야 할 적절한 단어는 ‘딱 하나(유일어)’뿐이기 때문이다.
수연산방 앞에 선 이태준. /국립현대미술관
◇고아나 다름없던 이태준
이태준은 1904년 철원에서 태어났다. 이태준의 집에 “웃어른이 아니 계신” 이유는 그가 고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개화파 지식인이던 부친은 이태준이 다섯 살 때, 모친은 그가 여덟 살 때 돌아가셨다. 이태준이 쓴 자전적 글에 보면, 그는 너무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어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전교 1등 상을 받아 더부살이 친척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를 보고 기뻐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비로소 ‘엄마의 부재’를 깨닫고, 처음으로 펑펑 울었다고 한다.
친척집을 무작정 뛰쳐나와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서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휘문고보에 입학해 가람 이병기의 지도를 받았으나, 동맹휴학을 주도한 사건으로 중퇴하고 아예 일본 유학을 결행한다. 조치(上智)대학 문과에 입학하여 ‘공기만 먹고’ 고학으로 연명하던 시기, 마찬가지로 도쿄에서 유학하고 있던 동갑내기 친구 김용준(1904~1967)을 만난다. ‘근원수필’의 저자로 유명한, 근원 김용준 말이다.
김용준 /국립현대미술관
◇수필가이자 화가 김용준
김용준도 글을 참 진솔하게 잘 썼다. 근원수필 중 ‘두꺼비 연적을 산 이야기’는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쌀 살 돈도 없는데, 못생긴 두꺼비 연적을 사 들고 들어왔다고 아내에게 혼나는 내용이다. 책의 초판본에는 그 볼품없다는 연적의 삽화도 같이 그려져 있다. 분명 못생겼는데 왠지 정이 가는 두꺼비다. 이 삽화는 당연히 김용준이 직접 그렸다. 대중에겐 수필가로 더 유명하지만, 김용준의 본업은 화가이기 때문이다.
김용준이 쓴 '근원수필’ 중 '두꺼비 연적을 산 이야기'에 들어있는 삽화. 김용준이 직접 그렸다. /국립현대미술관
김용준은 경북 선산의 꽤 부유한 가문 출신이다. 당시 최고 명문 미술학교인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1926년 입학했다. 이 시기 유학생들 모임인 ‘백치사(白痴社·’바보 모임'이라는 뜻)’를 조직해 자신의 하숙집을 아지트로 삼았다. 집도 절도 없는 이태준이 바로 이곳에서 김용준의 신세를 지며 서로 친해졌던 것 같다.
이 무렵 김용준이 그린 ‘이태준 초상’(1928)이 남아있다. 딱딱한 종이에 올이 성긴 천을 씌워 마치 캔버스 같이 만든 허름한 바탕재 위에,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긴 태준의 모습을 담았다. 젊은 소설가의 우울과 몽상이 담긴 이 작품이 그래도 100년 가까운 세월을 버텨 살아남아 준 것이 고맙다.
김용준이 1928년 그린 '이태준 초상'. /국립현대미술관
◇골동을 사랑했던 예술 친구
둘은 귀국한 후에도 서울 성북동에서 서로 이웃해 살았다. 이태준은 ‘수연산방’에서, 김용준은 ‘노시산방’에서. 그런데 이들은 그저 ‘유학 동기’나 ‘동네 친구’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관계였다. 이들은 한 시대의 새로운 ‘사상’을 공유하고 선도하며 깊은 정서적 교감을 나눴던 솔 메이트이자 예술 동지였다.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이른바 상고주의(尙古主義)의 거두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괜히 고완(골동)을 만지작거리는 취미를 가지거나, 연적을 사왔다고 구박받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뚜렷하게 의식적으로 조선의 옛 전통을 연구하고 존숭했으며, 그 바탕 위에서 새로운 시대의 미학을 정립하고자 했다.
서양화를 전공한 김용준이 1930년대 그린 초기 유화 작품 '다알리아와 백일홍'. /국립현대미술관
서양화 전공자였던 김용준은 아예 ‘한국화가’로 전향했다. 그는 한국화를 독학으로 공부했다. 1942년에 그린 ‘기명절지 10폭 병풍’을 보면, 서양화 이력에서 시작된 그의 독특한 기법이 확인된다. 원래 기명절지는 중국 기물을 많이 갖다 놓고 그리는데, 김용준의 그림에서는 온갖 조선의 전통 기물이 등장한다. 조선 백자와 고려청자가 골고루 들어 있고, 문방사우와 책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매화, 난초, 연꽃, 수선, 감 등 화초와 열매도 풍성하게 담겼다. 그렇다고 옛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바나나, 토마토, 레몬 등 서양 과일이 곳곳에 박혀 있는 게 보이는가?
김용준의 기명절지 병풍. 1942년 휘문고보 직원들이 교장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김용준에게 제작 의뢰한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우리도 오늘날에는 제사를 지낼 때 반드시 옛 법을 따르지 않고, 멜론도 올려놓고 그러지 않나. 우리 고유의 전통, 즉 중국도 일본도 아닌 ‘조선’의 전통을 찾아내되 이를 현대화할 것. 그것이 이들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제였다. 오늘날 우리가 전통을 되짚어 현대성과 융합하려는 각종 시도를 문화계 전반에서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데, 이러한 ‘운동’의 선구자였던 셈이다.
◇최고 문예지 ‘문장' 함께 만들어
김용준이 표지화를 그린 이태준의 '무서록'. /국립현대미술관
이태준과 김용준은 여러 일을 함께했지만, 이들이 생애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역시 ‘책 만드는 일’이었다. 이태준은 책이야말로 “인공으로 된 모든 문화물 가운데 꽃이요, 천사요, 영웅”이라고 찬탄했다. 책은 “한껏 아름다워야” 하기에, 이태준이 쓴 책은 거의 다 김용준이 꾸몄다. 단편소설집 ‘달밤’ ‘돌다리’, 수필집 ‘무서록’ 등이 모두 김용준의 아름다운 장정으로 탄생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문예지 ‘문장’을 함께 편집했다. 추사 김정희를 가장 존경했던 이들은, 추사의 글씨에서 ‘문장(文章)’이라는 제호를 따왔다. 표지화에는 주로 김용준과 길진섭이 매화와 문방사우를 그리곤 했다. ‘문장파’라는 용어가 있을 만큼 이 문예지를 둘러싼 문예인이 한때는 시대를 주름잡았다.
추사의 글씨체로 제호를 만든 당대 최고 문예지 '‘문장(文章)’.
◇북에서 맞은 불행한 말로
많은 지식인이 해방 후 월북했지만, 이들이 둘 다 북으로 간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이태준은 북으로 떠나며 두 여동생에게 유산을 나눠 관리하게 했다. 한 명에게는 살던 집을 주었다. 성북동 ‘수연산방’이 그 자손에 의해 현재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요즘 MBC 예능 ‘놀면 뭐하니'에 나오는 그 한옥이다. 다른 한 명에게는 집의 모든 물건을 관리하게 했다. 그 둘째 누이의 아들(이태준의 외조카)이 서울대 영문과 김명렬 명예교수다. 그 집에 전하던 몇몇 유품 중 이태준이 쓰던 책장 하나가 전쟁 통에도 용케 살아남아, 이번 전시에 빌려 왔다. 이태준이 그토록 좋아하던 ‘책’을 보관하던 오동나무 책장.
이태준이 썼던 오동나무 책장. /국립현대미술관
이태준은 북으로 간 후 얼마 못 가 숙청되었다. 시인 임화나 설정식처럼 사형을 당하지는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그는 1955년 이후 공장 노동자, 인쇄공 등으로 일했고, 말년에는 고물상을 했다고 한다. 언제 죽었는지조차 모른다.
김용준은 그래도 북에서 좀 더 오래 버텼다. 그러나 1967년 김일성의 사진이 있는 신문을 구겨 버렸다는 이유로 문책당할 것이 두려워 자살했다는 설이 있다. 김정일의 둘째 부인인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의 회고록에 따른 것이지만, 쉬이 믿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 무렵 무용가 최승희마저 숙청됐으니, 김용준은 곧 자신이 숙청될 운명임을 예견하고 자결을 택한 것일까. 알 길이 없다.
변월룡이 1953년 그린 '김용준 초상'. 월북 후 김용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 이 글에 소개된 작품은 5월 30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전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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