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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문화 . 시사

미국 배가 구해준 어부, 일본 근대화 스승으로 돌아오다나라 운명 바꾼 존 만지로 上 ........ 신문물 배운 첫 일본인

by 주해 2022. 12. 12.

2021-09-07 09:51:19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1/09/07/5JZXVKVXFFGXHKVYY6O6TX56ZY/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9] 미국 배가 구해준 어부, 일본 근대화 스승으로 돌아오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9 미국 배가 구해준 어부, 일본 근대화 스승으로 돌아오다 나라 운명 바꾼 존 만지로 上 - 신문물 배운 첫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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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운명 바꾼 존 만지로 上 - 신문물 배운 첫 일본인

일본인 눈에 비친 미국의 흑선 - 1853년 7월 일본 에도만에 페리 제독의 미 해군 함대가 들어와 개국을 강요한 사건을 일본인들은 ‘흑선 내항’이라고 불렀다. 서방에서 온 거대한 검은 군함이 당대 일본인들 눈에는 연기를 뿜는 뿔 달린 괴물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는 만지로(万次郞)가 있었다. 만지로는 우연한 난파 사고 뒤 미국 포경선을 타고 세계를 일주했으며 미국서 영어와 항해 기술을 익히고 서구 사회와 경제 발전을 경험한 인물. 그는 개항 협상 당시 쇼군 정부에 미국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제공했으며, 협상장 옆방에서 대화를 엿들어 바로 내용을 알려주는 비밀 통역 역할도 맡았다. 그림은 2004년 미 콜로라도주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공개됐던 ‘흑선’을 묘사한 일본 에도 시대 목판화. /게티이미지코리아

사회와 국가의 발전 역량은 사람 능력을 얼마나 잘 살리느냐에 달려 있다. 때로 한 사람의 지식과 경험이 역사 발전을 크게 촉진하는 수도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우연한 난파 사고 끝에 미국 포경선을 타고 세계를 일주하고 미국에서 생활하며 서구식 사회와 경제 발전을 경험하고는 천신만고 끝에 귀국하여 일본 개화에 큰 공헌을 한 만지로(万次郎)가 그와 같은 사례라 할 수 있다.

만지로는 시코쿠의 나카노하마라는 작은 마을의 빈한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1841년, 열네 살 만지로는 일거리를 찾아 이웃 도시인 우사(宇佐)로 가서 작은 어선에 타게 되었다. 5명이 승선한 배는 물고기 떼를 쫓아 먼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났다. 난파한 배는 일주일 동안 하염없이 태평양 쪽으로 표류하다가 도리시마라는 무인도에 표착했다. 동료 한 명은 다리까지 부러진 상태였다. 이들은 다섯 달 동안 동굴에서 근근이 연명하다가 근처를 지나던 미국의 포경선 존 하울랜드(John Howland)호에 구조되었다. 윌리엄 위트필드 선장이 지휘하는 이 배는 미국 매사추세츠의 뉴베드퍼드항에서 선원 28명을 태우고 조업 기간 3년 예정으로 출항하여 고래를 쫓아 태평양 각지를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본격 석유 시대가 도래하기 이전인 18~19세기에 고래 기름은 조명 원료나 윤활유로 사용하는 핵심 자원이었고, 포경업은 신생 미국을 상징하는 국민 산업으로 발전했다. 특히 뉴잉글랜드의 포경선들은 전 세계를 항해했다. 그러던 중에 만지로 일행을 구조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 시기에 일본이 철저한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외국 선박뿐 아니라 심지어 어떤 이유에서든 외국에 나갔던 자국인마저 입국을 막았고, 이를 어기면 자칫 사형당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터라 구조한 어부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방법이 없었다. 별수 없이 만지로와 동료들은 미국 포경선을 타고 세계 일주를 하게 되었다. 미국 선원들은 만지로를 ‘존 멍(John Mung)’이라 불렀는데, 어감으로 보건대 분명 놀리는 의미일 것이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는 못했으나 만지로는 ‘멍~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선원들이 일하는 것을 면밀히 관찰했고 기본적인 영어도 터득해 갔다. 다섯 달 후 존 하울랜드호는 중간 보급 기지인 하와이에 들렀다.

그때 구조되지 않았다면… - 우연한 기회에 미국 문명을 배워 개항기 일본 통역, 교육자로 활동한 만지로(1827~1898). /위키피디아

위트필드 선장은 일본 어부들이 호놀룰루에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렇지만 만지로는 계속 배에 남아 일하고 싶어 했다. 다시 한 철 포경 항해를 마친 후 만지로는 위트필드와 함께 1843년 5월 뉴베드퍼드에 입항했다. 위트필드는 곧 결혼하여 이웃 도시 페어헤이븐(Fairhaven)에서 만지로를 데리고 살았다. 만지로는 최초의 미국 거주 일본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위트필드는 만지로에게 선생을 붙여서 영어 실력을 키워준 다음 수학, 항해, 측량 등을 가르치는 발리트 학교(Bartlett School)에 입학시켰다. 이곳에서 만지로는 서구의 항해 기술을 온전히 습득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방학 기간에는 통 제조술을 습득했는데, 이것은 고래 기름을 담는 통이 많이 필요한 포경선에서 일자리를 얻는 데 유리한 기술이었다.

1846년, 19세의 만지로는 포경선 프랭클린호에 승선할 수 있었다. 이 배는 대서양으로 나가서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양을 지나 태평양으로 향했다. 이 배가 일본 근해에 도착하여 만지로는 최초로 세계 주항을 한 일본인이라는 기록도 남기게 되었다. 하와이에 들러 옛 동료들을 만났을 때 이 중 두 명을 배에 태웠다. 프랭클린호는 1849년에 귀항했고, 만지로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액인 350달러를 손에 넣었다. 그는 언젠가 일본으로 돌아가려면 돈을 더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던 소위 ‘골드러시’ 시대였다. 그는 배를 타고 캘리포니아로 가서 사업을 벌여 몇 달 만에 600달러를 벌었다. 이제 귀향 계획을 실천에 옮길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하와이로 가서 중고 보트를 한 척 산 후 태평양 횡단 항해를 하는 화물선에 싣고, 일본 근해에 이르렀을 때 세 사람을 보트에 태워 내려달라는 계약을 했다.

1851년 2월, 류큐 근해에 내린 세 사람은 몇 시간 노를 저어 오키나와섬에 들어갔다. 난파 사고 후 10년 만의 일이다. 그렇지만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철저한 취조였다. 류큐 왕국 관리가 6개월 동안 그들의 행적을 자세하게 조사한 후 가고시마로 인계하여 6주 동안 조사하고, 그 후 다시 나가사키에서 불러 쇼군 관리가 조사했다. 만지로가 전보라는 신기술에 대해 설명하자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고, 미국의 민주주의 체제에 대해 우호적으로 말하면서 일본도 빨리 개방 정책을 펴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자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다시 몇 달이 지난 후 드디어 석방 결정이 났고, 만지로는 꿈에 그리던 고향 나카노하마로 가서 어머니와 동생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고향에 온 지 사흘 만에 도사번 다이묘인 야마우치가 만지로를 소환했다. 야마우치는 개혁 지향적 인물이어서 만지로에게 지역 엘리트 자제들에게 외국 경험을 가르치도록 주선했다. 미천한 어부 신분으로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으므로 만지로를 다이묘의 가신, 곧 하급 사무라이 신분으로 승격시켰다. 만지로는 서구의 항해, 포경술 외에 알파벳도 가르쳤다. 후일 그는 일본 최초 영어 교과서를 집필하였는데, 이 교과서는 오랫동안 일본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에게 영어를 배운 제자 중에는 일본 개화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후쿠자와 유키치도 있다.

 
 
세계를 한바퀴 돈 만지로의 여정 - 1850년대에 만들어진 나카하마 만지로의 여행 지도. 어선 난파로 미국 포경선에 구조된 뒤 하와이와 태평양, 대서양과 아프리카, 인도양 등을 종횡무진한 그의 여행 경로가 표시돼 있다.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다음 해인 1853년 페리 제독(Commodore Matthew Perry)이 흑선을 이끌고 에도만에 들어와서 미국 정부를 대표하여 개항을 강요했다. 쇼군 정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무엇보다 미국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이 상황에서 미국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 만지로였다. 에도로 소환된 만지로는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소상하게 정보를 제공했다. 그렇지만, 관료 중에는 그를 의심하는 사람도 많았다. 자꾸 미국에 우호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진정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건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협상장에서 미국 대표들과 마주 앉는 공식 통역 직위를 주지는 않았다(공식 통역은 네덜란드 상인에게서 영어를 배운 모리야마 에이노스케(森山榮之助)였는데, 미국 측 반응은 거의 완벽하게 영어를 구사한다는 것이었다). 만지로는 협상장 옆방에서 미국인들 대화를 엿듣고 바로바로 그 내용을 알려주는 비밀 통역 역할을 했다. 쇼군은 만지로가 제공한 정보가 매우 유용했고, 그가 성실하게 도와주었다고 판단하여 막부의 가신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평민에서 귀족 지위로 올라선 만지로는 성을 가지게 되었고, 고향 이름을 따서 나카하마(中濱)로 지었다.

이후 나카하마 만지로는 메이지유신 시기에 일본의 개화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엘리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서구 정치 제도에 대해 논하고, 외교 업무를 돕고, 조선(造船)과 해군 창설 등에 직접 간여했다.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자.

[미국 간 또다른 일본인 오토키치]

14개월 표류끝 美서부 도착

인디언 노예 됐다가 영국행… 귀국시도했지만 일본이 거부

만지로와 유사한 인생 행로를 보인 인물이 또 있다. 1832년 오토키치(音吉 또는 乙吉·1818~1867)는 14세에 쌀 운반선 호준마루(寶順丸) 선원으로 일하다가 풍랑을 만나 태평양 멀리 떠밀려가게 되었다. 무려 14개월 동안 표류한 끝에 1834년 미국 서부 해안에 도착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이와키치(29), 규키치(16), 오토키치(15) 등 3명의 ‘키치 브러더스’였다.

이들은 이 지역 마카(Makah) 인디언들에게 붙잡혀 노예로 살다가 영국계 회사 직원에게 인계되었다. 이들을 이용해 일본의 문호를 개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런던으로 보냈으나, 영국 정부는 그 아이디어를 수용하지 않고, 이들을 마카오로 보내 일본에 귀향시키려 했다. 그렇지만 일본 측은 이들의 입국을 완강히 거부했다. 오토키치는 마카오와 상하이, 싱가포르 등지를 전전하며 두 번 결혼했고, 번역가와 선원 일을 하다가 영국 국적을 얻었다.

‘오토상’은 ‘오토슨(John Matthew Ottoson)’이 되었다. 그는 일본어를 잘하는 중국인 행세를 하며 일본에 들어가기도 했고, 1854년 영국-일본 우호 조약을 체결할 당시에는 영국 측 통역을 담당했다. 후일 귀국 허가를 받았으나 아내와 헤어질 수 없어서 싱가포르에서 여생을 보냈다. 2005년 싱가포르의 일본인 묘지에서 그의 유해 절반을 수습하여 고향 미하마(美濱)에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