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12 08:21:23
[미술 세상 졸보기] 민중미술이 한국 동시대 미술의 출발점? 난 동의할 수 없다
국현 소장품 상설전 지난달 개막, 현대미술 역사 통합 최초 시도
지난달 6일 국립현대미술관은 'MMCA 소장품 하이라이트 2020+'전을 개막했다. 미술관이 갖고 있던 소장품 전시라니까 늘 하던 게 아닐까 싶겠지만 서울관에서 처음으로 개최되는 소장품 상설전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미술관 운영에 제동이 걸리면서 아직 많은 관객을 맞이하지 못했고 또 미술계에서도 이 전시에 대한 토론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소장품 상설전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를 통합적으로 그려내려는 최초의 시도라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리다. '소장품 하이라이트'라는 명칭만 봐도 국립현대미술관이 모마(뉴욕 현대미술관)의 '소장품 하이라이트' 전시를 참조했다는 사실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하면 구성 면에서도 그에 필적하는 시도가 있었을까.
모마는 작년 10월 21일 재개관하며 기존의 소장품 상설전과는 다른 다원적·다층적 모더니즘의 역사를 제시하는 방향을 취해 큰 호평을 받았다. 모마 특유의 역사관이 그간 소외해왔던 탈식민 국가의 전후 모더니즘 작업을 비롯해 여성 작가들과 흑인 작가들, 그리고 성소수자 작가들의 작업을 대거 포함하며 정치적으로 더 올바른 역사를 포착하고자 애쓴 것이 특징이었다.
5층에서 4층을 거쳐 2층으로 이어지는 무려 62개의 갤러리를 통해 모마는 188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는 역사를 아주 분명한 해석을 통해 제시했다. 코너마다 논쟁적 요소가 가득했다. 초심자들을 위해 대표 소장품 375점을 선별해 안내하는 책자에도 과거엔 볼 수 없던 170점의 작업이 새로 수록됐으니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예상하기 어려웠던 대대적 변화였다. 모마는 과거와 달리 안내 도록에서 작가 10인의 대표작 10점을 특선해 강조했는데 그 주인공은 잭슨 폴록, 바넷 뉴먼, 찰스 호세인 젠더루디, 앤디 워홀, 이소자키 아라타, 앨마 우지 토머스, 이본 레이너, 브라이스 마든, 부크라 칼릴리, 카라 워커였다. 이 10명 가운데 약 5명이 대안 미술사적 선택에 속하니 역시 파격이다. 심지어 모마는 2010년대 중반 좀비형식주의 미술의 개척자로 재평가·재조명된 레즈비언 화가 에이미 실먼을 큐레이터로 초빙해 소장선 전시 속의 특별전 '모양의 모양-작가의 선택: 에이미 실먼'을 선보이기도 했다. 아웃사이더 작가였던 에이미 실먼은 이제 거장으로 존경받는다. 원래 5월에 예고됐던 소장품 상설전 업데이트는 현재 코로나 사태로 개막을 못 하고 있지만 모마는 갤러리 62개 가운데 무려 20개를 새로 꾸미겠다고 공언했었다. 전 세계 어느 주요 미술관에서도 본 적이 없는 새롭고 또 성실한 면모다.
일러스트=양진경
하면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전은 어떨까. 많은 이의 기대와 달리 전시는 평면적 나열에 그쳤다. 전시는 '개항에서 해방까지' '정체성의 모색' '세계와 함께' '다원화와 글로벌리즘' 등 4부로 구성됐지만 실제론 큰 갤러리 하나를 단색화로 대표되는 모더니즘파가 차지하고 또 다른 큰 갤러리 하나를 민중미술로 대표되는 운동권 좌파가 차지한 다소 괴상한 모습이었다. 소외됐던 여성 작가나 성소수자 작가를 재조명하거나 아니면 여성 작가의 비율을 올려 성비를 맞추려는 시도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고희동의 유화로 출발하는 구성은 서화협회로 이어지는 수묵화 현대화의 초기 역사를 배제했다는 점에서 유감스러웠다. 하지만 극히 논쟁적인 부분이 하나 있기는 했다. 동시대 미술을 이야기하는 '다원화와 글로벌리즘' 섹션에 민중미술(여성 미술 포함)을 대거 포진시켜 놓고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등장한 신세대 작가들, 즉 이불과 서도호의 전시를 다 보고 나가는 복도에 내놓은 것. 반면 1990년대 후반에 나타난 포스트-민중미술에 속하는 배영환만은 운동권 좌파가 차지한 안쪽 갤러리에 놓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를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의 각축으로 그려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따라서 이런 파벌적 대립 구도마저도 흥미롭게 봐줄 수 있다. 하지만 1979년에 시작한 민중미술운동이 한국 동시대 미술의 출발점이 맞을까?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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