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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한국 미술사

50억에 시작해 50초 만에 끝났다… '겸재 화첩'의 굴욕..

by 주해 2022. 11. 29.

고미술 최고가 기대했던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 경매서 유찰, 왜?

"겸재 정선의 작품, 50억 확인합니다."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50억 여쭙고 있습니다. 50억, 50억, 50억원." 15일 오후 서울 신사동 케이옥션 경매장. 세 차례 호가에도 반응이 없자 경매사가 "땅!" 하고 망치를 내리쳤다. "유찰입니다!"

보물 제1796호 겸재 정선(1676~1759)의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이 케이옥션 경매에서 새 주인을 찾지 못하고 유찰됐다. 화첩은 이날 경매의 마지막에 등장했다. 경매사는 "50억원으로 시작해 5000만원씩 호가한다"고 알렸으나, 현장에서도, 전화와 서면으로도 응찰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경매는 단 50초 만에 끝났다.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에 내놨다"

당초 케이옥션이 밝힌 추정가는 50억~70억원. 낙찰되면 국내 고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最高價)를 경신하게 돼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기존 고미술품 최고 낙찰가는 2015년 조선 후기 불화 '청량산괘불탱'(보물 제1210호)이 세운 35억2000만원이다.

이번에 나온 겸재 화첩엔 금강산과 동해안 명소를 그린 진경산수화 8점과 중국 송나라 유학자들을 소재로 그린 고사인물화 8점 등 총 16점이 수록됐다. 케이옥션은 "겸재의 '해악전신첩'(보물 제1949호)에는 없는 비로봉, 혈망봉, 구룡연, 옹천, 해금강이 추가돼 있어 진경산수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금강산 진경산수화와 송대 유학자의 고사인물화라는 서로 다른 주제를 균형 있게 한 화첩에 모은 드문 예라는 점을 인정받아 2013년 2월 보물로 지정됐다.

15일 케이옥션 경매장에 출품된 보물 제1796호 겸재 정선의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 시작가 50억원에 나왔으나 응찰자가 없어 50초 만에 유찰됐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시작가 50억원'은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이라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회화사 전문가 A씨는 "몇 년 전에 20억~30억원에 시장에 내놨던 작품이고 거래 성사 직전까지 갔던 것으로 안다"며 "소장자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취소됐었다"고 했다. 또 다른 전문가 B씨는 "겸재의 '해악전신첩'과 비교할 만한 작품은 아닌데 옥션 측이 무리해서 홍보한 측면이 크다"며 "공신력 있는 경매 회사라면 일단 지르고 볼 게 아니라 보다 냉정하게 가격을 책정했어야 했다"고 비판했다. 반면 이원복 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은 "전반적으로 고미술 작품 가격이 너무 저평가돼 있다. 우리 그림의 자존심이라고 할 만한 겸재의 작품이고, 16점이 한 세트를 이룬 화첩이기 때문에 높은 가격은 아니다"라고 했다.

◇보물이 왜 자꾸 경매에?

이번 경매는 간송 전형필(1906~1962)의 후손이 내놓은 불상 2점에 연이은 '보물' 문화재의 출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앞서 지난 5월 보물 제284호 금동여래입상과 보물 제285호 금동보살입상이 각각 시작가 15억원에 나왔으나 응찰자가 나오지 않아 모두 유찰된 바 있다. 간송 불상에 이어 겸재 화첩까지 '보물'이 잇따라 유찰되면서, 고미술 시장이 얼어붙은 게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국보' '보물' 등 국가 지정문화재도 개인 소장품인 경우에는 국외에 반출하지 않는 한 소유자 변경 신고만 제대로 하면 사고팔 수 있다. 문화재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17~2019년 보물 18점이 시장에서 팔렸고 그중 4점이 경매로 성사됐다. 고미술계 관계자들은 "선대 소장자의 컬렉션을 2, 3대가 이어받으면서 가치관과 취향이 바뀌거나, 심각한 재정난 때문에 내놓는 경우 등 이유는 다양하다"고 했다.

이번 겸재 화첩의 소유자인 우학문화재단(이사장 이학)은 이규훈(1914~2004) 전 용인대 이사장이 1996년 설립했다. 국보 제262호 '백자 달항아리' 등 명품을 다수 소유한 고미술계 큰손이지만, 지난해 서울옥션에 보물 제1239호 '감로탱화'를 내놓은 데 이어 또다시 보물을 내놔 재정난이 심각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전문가들의 견해는 엇갈린다. 한 사립대 교수는 "개인 소장품인 만큼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는데 너무 특별한 것처럼 조명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고 했다. 반면 이광표 서원대 교수는 "보물이 연이어 유찰되면서 부정적 인식을 줄 수 있어 우려된다. 보존 가치가 높아 국가에서 지정한 문화재인데 '가격'만 부각되면서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며 "소장자들도 일단 보물로 지정되면 작품의 권위가 올라가고 지원금을 받는 등 실질적 혜택을 누리는 만큼 그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