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08 22:26:53
https://www.chosun.com/opinion/cafe_2040/2021/01/08/X77KBXFH5JFHFBOMVMM7C36YFE/
가슴 뜨거웠던 한 사내의 삶과 그의 애장품을 생각하며 새해 첫 주를 맞았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컬렉터이자 뛰어난 서예가였고 정치에 투신했던 소전 손재형(1903~1981) 얘기다. 지난해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 선생의 ‘세한도(歲寒圖)’ 기증 소식을 취재하면서 그에 대해 궁금증이 커졌다.
20세기 중반 촬영한 소전 손재형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이 걸작의 파란만장한 소장사(史)에서 그를 빼놓을 수 없다. 손재형은 일본으로 건너간 세한도를 되찾아온 주인공이다. 1943년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가 그림을 갖고 일본으로 귀국하자, 이듬해 거금을 들고 도쿄로 갔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도쿄는 밤낮 없이 계속되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손재형은 병석에 누워 있는 후지쓰카 집을 매일 찾아가 “세한도는 조선 땅에 있어야 한다”고 애원했다. 100여일 만에 후지쓰카 마음이 움직였고 결국 세한도를 내주었다. 그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세한도는 한 줌의 재로 변했을지 모른다. 석 달 뒤 후지쓰카 집에 포탄이 떨어져 불이 났기 때문이다.
여기까진 널리 알려진 얘기. 이후 손재형은 정치에 참여하면서 소장품을 저당 잡히고, 세한도는 개성 출신 사업가 손세기 소유가 된 뒤 아들 손창근 선생에 의해 국민 품에 안겼다. 우리나라 문화재 역사에 길이 남을 경사다. 그런데 한편으론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목숨 걸고 세한도를 되찾아온 손재형은 왜 끝까지 애장품을 지키지 못했을까.
추사 김정희 '세한도'. 그림: 23.9x70.4cm, 글씨: 23.9x37.8cm. /국립중앙박물관
손재형은 전남 진도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재력이 상당했던 할아버지 손병익 슬하에서 한학과 서법의 기본을 익혔다. 양정고보 시절부터 추사 작품에 심취해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서 추사의 ‘죽로지실(竹爐之室)’을 천원에 낙찰받았다. 당시 경성에서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 “그가 학생 모자를 쓰고 광화문 비각 앞에 서 있으면 어느새 알아보고 골동 중개인들이 따라 나섰을 정도”(월전 장우성 회고록)로 일찍이 수집가로 이름을 떨쳤다. 이후 당대 최고 서예가인 김돈희에게 글씨를 배우면서 추사의 서화에 더 몰두하게 된다. 본인 스스로도 글씨체를 갈고닦아 개성적인 소전체를 완성했다. 우리가 쓰는 ‘서예’라는 용어도 그가 창안한 것이다.
그는 열정적인 컬렉터였다. 195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추사 100주기 전람회 출품작 중 절반이 그의 소장품이었다. 하지만 국회의원 출마와 낙선을 거치면서 반평생 모은 컬렉션이 흩어지게 된다. 셋째 아들인 손홍 진도고등학교 이사장이 자세한 얘기를 들려줬다. “자유당 시절 무소속으로 민의원에 당선되면서 이미 자금을 많이 썼고 1960년 선거에 또 나서면서 돈이 급박해졌다. 풍랑을 맞아 진도에서만 선거가 열흘 연기되는 바람에 급전이 필요해 세한도를 사채업자에게 저당 잡혔다. 선거만 끝나면 되찾아올 생각이었지만 낙선했다. 갖고 있던 목포의 극장과 서울 효자동 집, 배와 염전까지 내놓고 급한 불을 끈 뒤 찾으러 갔지만 이미 그림은 일곱 사람을 거쳐 새 주인에게 넘어간 뒤였다.”
아들은 “세한도가 넘어간 뒤 아버지는 골동에 대한 애착을 잃었다”며 “누가 와서 감정해달라고 해도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이후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같은 명품이 호암미술관으로 흘러간다. 이병철 회장에 이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부부가 30대 나이에 최초로 구입한 미술품이 손재형의 소장품이었다. “정치에 입문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랬으면 분신처럼 여겼던 세한도도 지켰을 테고.” 다행히 작품은 눈 밝은 주인을 만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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