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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문화 . 시사

여순 사건을 다시 보다....

by 주해 2022. 12. 6.

 

여수 14연대 좌익의 반란... 고교 80% ‘무장봉기’로 가르쳐

 

1948년 10월 여순 사건 진압 후, 반란군 협조자를 가려내기 위해 주민들을 한곳에 모아놓았다.

‘여순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한 국방경비대(국군 전신) 14연대 2000여명이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여수·순천 등을 점령하면서 일어난 현대사의 비극이다. 반란군은 지역 좌익 세력과 함께 ‘제주도 출동 반대’ ‘미군 즉시 철퇴’ ‘인공(人共) 수립 만세’ 같은 성명서를 여수 읍내 곳곳에 붙였다. 경찰관과 기관장, 우익 청년단원, 지역 유지 등을 여수 경찰서 뒤뜰에서 집단 사살하기도 했다. 정부는 군을 파견해 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했다. 노무현 정부 때 출범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가 2009년 발표한 보고서에 이렇게 나온다.

대한민국에 총부리 겨눈 14연대

여순 사건은 한때 ‘여순 반란’ ‘여순 폭동’ 등으로 불렸다. 정규군이 공식 명령을 거부하고 총을 거꾸로 든 전형적 반란이기 때문이다. 진압군에 쫓겨 지리산에 들어간 14연대 반군은 빨치산 투쟁을 벌였다. 그런데, 지금 전국 고교 10곳 중 8곳은 ’14연대 반란'을 ‘무장봉기’ 또는 ‘봉기’로 가르치는 한국사 교과서로 수업 중이다. 작년에 새로 바뀐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 중 7종이 14연대 반란을 그렇게 서술했기 때문이다.

한국사 교과서 여순사건 기술

본지가 최근 국회 정경희(국민의힘) 의원실과 함께 고교 한국사 교과서 채택 현황을 조사했더니, 작년 한국사 교과서를 새로 선정한 전국 고교 1893곳 중 1527곳(80.7%)의 교과서가 ’14연대 반란'을 ‘무장봉기(봉기)’로 서술했다. 고교생 4명 중 1명꼴로 가장 많이 배우는 미래엔 교과서(25.3%)는 “부대 내의 좌익 세력은 ‘제주도 출동 반대’ ‘통일 정부 수립’을 내세우며 무장봉기하여 여수와 순천 지역을 장악하였다”고 썼다. 금성·동아·해냄·지학사·씨마스 등 6종 모두 ‘반란’ 대신 ‘무장봉기’로 기술했고, 천재교육은 ‘봉기’로 썼다. 비상교육 1종만 ‘군대 내 좌익 세력이 출동을 거부하고 여수와 순천을 일시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며 봉기라는 표현을 피했다.

일부 학자들 “중립적 용어인 ‘봉기’ 써야”

반란, 폭동은 부정적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중립적 용어인 ‘봉기’를 쓰는 게 낫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총부리를 겨눈 여수 14연대의 행위를 봉기로 쓰는 게 적절한지 의문이다. 5·16이나 12·12 사건을 교과서에서 군부가 ‘무장봉기’했다고 쓰면 어떻게 될까. 현행 한국사 교과서는 5·16과 12·12 사건을 ‘군사 정변’ ‘군사 쿠데타’ ‘군사 반란’으로 쓴다.

무엇보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는 ’14연대 소속 군인들의 반란을 시작으로…'라며 ‘무장봉기’가 아니라 ‘반란’이라고 명기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노무현 정부 때 펴낸 ‘6·25전쟁사’도 ‘여순 사건’을 ’14연대의 반란 사건'이라고 못 박았다.

“남로당이 14연대에 침투”

‘여순 사건’ 대신 ‘여순 항쟁’ 또는 ‘여순 민중 항쟁’이라고 써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여순 사건’으로 전북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주철희씨는 “여순은 제주도민을 학살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부당한 명령에 저항해서 일어난 군인들과 지역민들의 항쟁”이라고 했다. 도올 김용옥씨도 책 ‘우린 너무 몰랐다’와 방송 특강에서 ‘여순 민중 항쟁’을 편들었다.

14연대에 침투한 남로당 세포들이 사건 당일 연병장에 장병들을 모은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반란에 반대하는 장병을 즉결 처형한 것이다. 육군본부가 1954년 펴낸 ‘공비토벌사’(14쪽)엔 장교 3명과 하사관 3명을 살해했다고 썼지만 20여명이 총살당했다는 증언도 있다. 14연대 반란군은 여수에 진입한 뒤 좌익 세력과 함께 경찰관과 기관장, 우익 청년단원, 지역 유지 등을 인민재판에 넘겨 처형했다. 살육의 문을 먼저 열어젖힌 14연대 반군과 좌익 세력에게 정당성을 인정하는 ‘항쟁’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까.

김상봉 전남대 교수가 올 초 쓴 ‘폭력과 윤리: 4·3을 생각함’이란 논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남로당 무장대가 10살, 14살짜리 소녀를 마을 유지 딸이라는 이유로 칼과 죽창과 낫으로 살해하는 등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한 게 어떤 도덕적 정당성이 있느냐며 ‘무장봉기’ ‘항쟁’에 의문을 던졌다.

진보 성향 현대사 연구자 중에도 여순 14연대의 행위를 반란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창립한 역사문제연구소 서중석 이사장은 작년에 낸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개정판에서 ‘여순 사건은 지창수 상사 등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117쪽)고 썼다.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데, 교과서 8종 중 7종은 ‘무장봉기’라고 판박이처럼 쓴다. 교과서 주무부서인 교육부의 개입 내지 방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기막힌 일이 학교 교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걸 학부모들은 알고나 있을까.

여순특별법 속도내는 與, 최근 위령비 잇따라 참배

작년 발의, 현재 법안심사중

더불어민주당 의원 152명은 작년 7월 ‘여수·순천 10·19사건 특별법’을 발의했다. 순천 출신 소병철 의원이 대표 발의자로, 여순 사건 관련 지역구 출신 주철현, 김회재, 서동용, 김승남 의원이 주도하고 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상임선대위원장이 지난 18일 여수를 찾아 여순사건희생자위령비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법안은 행정안전위원회를 거쳐 지난 3일 국회 법안심사소위에 상정됐다. 여순 사건 진상 조사를 통한 희생자·유족의 명예 회복과 이들에 대한 의료비, 생활 지원금 지급 등이 골자다. 앞서 통과된 5·18 특별법, 4·3 사건 특별법과 유사한 내용이다. 이낙연 민주당 상임선대위원장은 지난달과 이달 순천 ‘여순항쟁탑’과 여수 ‘여순사건희생자위령비’를 잇달아 참배하며 특별법 통과를 다짐했다.

특별법 주요 대상은 여순 사건 진압 과정에서 희생된 민간인이다. 1949년 11월 전남 당국이 여순 사건 발생 지역 전체를 조사한 결과, 인명 피해는 1만1131명이었다. 반군과 지방 좌익, 빨치산에 의한 희생자도 포함되지만 진압군에 의한 희생자와 유족이 더 많은 것으로 보인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여순 사건 발발 직후부터 6·25 전후 전남 구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자 수를 조사한 결과, 총 1318명이었다. 이 중 군경과 우익 집단에 희생된 사람은 915명으로 전체의 69.4%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