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흔의 노부부가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200억원 상당 재산을 기부해 화제를 모았다. 화장 도구 업체 삼성브러쉬 장성환(92) 회장 부부였다. 통 큰 기부만큼이나 눈길을 끈 건 기부를 결심한 계기. 부부는 ‘실버타운 이웃사촌’이었던 김병호(80) 서전농원 회장이 2009·2011년 두 차례에 걸쳐 350억원을 쾌척한 것을 유심히 봤다고 한다. 같은 실버타운 출신 ‘KAIST 기부 동기’는 두 명 더 있었다. 고(故) 조천식 한국정보통신 회장과 손창근(92)씨. 손씨는 지난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국가에 기증해 주목받은 인물이다.
회장님 넷의 릴레이 기부가 일어난 실버타운은 어디일까. 세간의 관심이 쏠렸지만, 기사엔 이름이 공개되지 않았다. ‘아무튼, 주말’ 취재 결과, 해당 실버타운은 경기도 용인에 있는 ‘삼성 노블 카운티’. 은퇴자의 로망으로 꼽히는 최고급 실버타운 중 하나다. 이곳을 비롯해 유명 실버타운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실버타운계 스카이캐슬
업계에서 손꼽히는 실버타운계 양대 산맥이 있다. 실버 산업 전문가인 이한세 초고령사회 미래연구원 위원장은 “가격·서비스 등을 기준으로 삼성생명공익재단에서 운영하는 ‘삼성 노블 카운티’와 건국대에서 운영하는 서울 광진구 ‘더클래식 500’이 투톱으로 꼽힌다”며 “서울시니어스 타워, 수원 유당마을, 서울 성북구 노블레스 타워, 인천 마리스텔라 등도 유명하다”고 했다. 이덕수 한화생명 부동산 전문가는 “실버타운은 크게 도심형·도심근교형·전원형으로 나뉜다. 더클래식 500은 도심형, 노블 카운티는 도심근교형 대표 주자”라며 “어르신들에겐 병원이 중요한데 각각 건국대 병원, 삼성병원과 연계돼 인기가 있다”고 했다.
고급 실버타운의 입주보증금은 2억~9억원 정도. 2001년 문을 연 노블 카운티는 평형에 따라 보증금 2억1000만~9억7000만원에 월 생활비 290만~560만원 정도, 2009년 문을 연 더클래식 500은 단일 평형으로 보증금 9억원에 관리비 포함 월 생활비 500만~600만원 정도(옵션에 따라 다름)가 든다.
최근 서울시니어스 가양타워에 입주한 한 70대 여성은 “노블 카운티는 전원이 있어 공기는 좋지만 서울 나오기가 멀고, 더클래식 500은 시내에 있어 교통은 편하지만 보증금이 너무 비싸 좀 더 합리적인 곳을 찾았다”고 했다. 입주자 유치 경쟁도 있다. 한 실버타운 입주자는 “경쟁업체 관계자가 밥을 사주면서 단체로 회원을 빼간 적도 있다”고 귀띔했다.
◇돈 있어도 못 간다, 넘치는 대기자
만만치 않은 금액이지만 입주하려는 이들이 넘쳐 난다. 2000년대 초반 어머니를 실버타운으로 모신 60대 사업가는 “그때만 해도 부모님을 실버타운에 보내면 자식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식으로 색안경을 끼고 봤다. 남의 이목 때문에 이왕이면 이름난 고급 시설을 선택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했다.
최근 서울·수도권 지역 인기 실버타운은 공실이 거의 없다. 노블 카운티는 현재 만실이고, 더클래식 500도 6개월 이상 대기해야 한다. 이한세 위원장은 “20여 년 전 실버타운이 생겨났을 때는 보증금 2억~3억원이 큰돈이었다. 당시 강남 아파트를 팔아야 들어올 수 있는 금액인 데다 생활비 수백만원까지 부담하려면 웬만한 자산가 아니면 들어오기 어려웠다. 이후 20년 동안 강남 아파트 가격은 10배 이상 오른 반면, 입주보증금은 거의 안 올랐다. 보증금이 아파트를 전세 주고도 들어갈 수 있는 금액이 되면서 진입 장벽이 낮아졌다”고 했다.
노블 카운티 관계자는 “7~8년 전부터 교사, 공무원 출신 등 연금 생활자 주민도 많아졌다”고 했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위생상 안전하다는 이유로 들어오려는 사람도 꽤 늘었다.
실버타운계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용인의 '삼성 노블 카운티'(왼쪽)와 서울 광진구에 있는 '더클래식 500'.
◇회장님, 장관님?…여기선 ‘회원님'
“초기엔 회장님, 장관님 등 과거 직함으로 불렀는데 불편하게 느낀 이들이 생겼어요. 이후 공식 호칭은 ‘회원님’이라고 통일하게 됐죠. ‘3금(禁)’도 있어요. 자식 자랑, 재산 자랑, 지위 자랑 금지. 서울대 나온 자식 자랑했더니 하버드, MIT 출신 자식들이 즐비하더라고요(웃음).” 노블 카운티에 살다 나온 한 여성이 말했다.
더클래식 500과 노블 카운티는 특히 ‘상위 0.1%가 사는 노인 주택’으로 불린다. 고관대작 출신이 즐비하다. 더클래식 500에 사는 70대 주민이 말했다. “장차관, 병원장, 장군 출신 등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널렸어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들어와 화제가 되기도 했죠. 내놓고 티 내지는 않지만 빤히 다 알아요. 누가 졸부인지도 척 보면 알고요.”
초반에 적응하기 어려웠다는 이들도 있다. “출신에 따라 그들만의 무리가 있어 자수성가한 우리 부부의 경우 처음에 적응을 잘 못했어요. 아내들도 ‘이대파’ ‘숙대파’로 나뉘어 있는데 이도 저도 아니니 영 어색했고요. 그런데 살다 보니 사람 사는 세상 다 똑같더군요. 다들 나이가 많아서 10분 넘게 대화하면 지쳐서 남 얘길 못 해요(웃음).” 실버타운에 10여 년 살다 최근 나왔다는 80대 여성 얘기다.
입주자 만족도는 높은 편. 노블 카운티에 20년 산 한 주민(90)은 “7학년(70대)에 들어와서 9학년(90대)이 됐다. 여긴 10학년(100세) 선배도 많아 나이 들었다는 생각을 못한다. 각종 문화 프로그램이 많아 외로울 틈이 없고, 산책 공간도 많아 건강하게 산다”고 했다. “밖에서는 굉장한 부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초호화는 아니다”라던 그가 덧붙였다. “지인이 들어오면 과거(지위) 얘기 말고, 너무 깊이 사귀지 말라고 해요. 여기도 사람 사는 곳, ‘인간백화점’이지요. 이런저런 사람이 있으니 서로 조심하면서 공동생활 규칙을 어기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밥 때문에 왔다 밥 때문에 나가?
“나이 드니 세끼 준비하고 청소하는 게 점점 힘들어지더군요. 일주일에 두 번씩 와서 세탁, 청소해 주고 식당에 가서 차려준 밥을 먹는데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무엇보다 24시간 대기하는 간호사가 있어 든든합니다.” 더클래식 500에서 10년 산 80대 입주자의 말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의외로 ‘밥’ 때문에 실버타운으로 들어오는 부자들이 많다고 한다. 때론 식사가 발목을 잡는다. 한 실버타운 입주자는 “새로 들어오면 석 달은 고생한다. 암암리에 밥 먹는 그룹이 정해져 있는데 거기를 못 끼니 멀뚱멀뚱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한세 위원장은 “초반 3개월이 적응 기간이라고들 한다. 복지사가 고참 마당발 입주자에게 새 입주자가 잘 적응하도록 식사 때 특별히 신경 써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고 했다. 여럿이 있다 보니 복장도 신경 쓰인다. 한 업체 관계자는 “식당에 가면 화려하게 명품으로 휘감고 오는 분들이 꼭 있다”고 했다.
별별 해프닝도 많다. “식당 밥이 아무리 맛있어도 계속 먹으니 물리고 집밥이 그리워져요. 간단히 생선찌개를 끓여 먹었다가 냄새가 안 빠진다고 어르신들끼리 싸우기도 하지요.” 10년 넘게 고급 실버타운에 살다가 최근 나온 한 부부의 증언이다. 이들은 “한 달에 생활비 500만원을 계속 내자니 아깝더라. 그 돈 절약해 고기나 실컷 먹자면서 ‘탈출’했다”며 웃었다. 또 다른 실버타운 입주자는 “싱글 회원들끼리 연애하는 경우도 왕왕 있는데, 그 또한 황혼의 재미 아닌가 하고 웃어넘긴다”고 했다.
◇기부 릴레이…선한 영향력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노블 카운티 한 주민(81)은 “2009년부터 ‘보은회’라는 기부 모임을 만들어 삼성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의 치료비를 지원하고 있다”며 “적은 금액이라도 형편이 닿는 대로 도우며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2009년 김병호 서전농원 회장의 기부를 계기로 10년 넘게 노블 카운티를 찾았다는 KAIST 장학재단 관계자는 “이웃에서 처음엔 딸이냐, 며느리냐 묻더니 장학금 담당자라는 걸 알고 관심을 가지더라. 이게 결국 릴레이 기부로 이어졌다”고 했다. 그는 “1970~80년대 한국의 경제 성장을 오롯이 경험한 세대여서 국가에 봉사해야 한다는 의식이 투철하다. 피땀 어린 그들의 일생을 후세대를 위해 아낌없이 내놓는 모습에 감동받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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