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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전시 . 탐방 . 아트페어

전시 끝나면 사라질 파스텔 벽화 앞… 우뚝 놓인 조선시대 태항아리'파스텔의 마법사' 니콜라스 파티 호암미술관서 한국 첫 개인전

by 주해 2024. 9. 2.

전시 끝나면 사라질 파스텔 벽화 앞… 우뚝 놓인 조선시대 태항아리

 

전시 끝나면 사라질 파스텔 벽화 앞… 우뚝 놓인 조선시대 태항아리

전시 끝나면 사라질 파스텔 벽화 앞 우뚝 놓인 조선시대 태항아리 파스텔의 마법사 니콜라스 파티 호암미술관서 한국 첫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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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파티가 파스텔로 그린 벽화 ‘동굴’과 조선 왕실의 탯줄을 보관했던 ‘백자 태호’가 호암미술관 1층 전시장에 함께 전시됐다. 파티가 용인에 6주간 머물며 그린 벽화는 전시가 끝나면 사포로 지워질 운명이다. /호암미술관

인류 예술의 기원을 담은 ‘동굴’ 벽화 앞에 조선 왕실의 탯줄을 보관했던 백자 태항아리[胎壺]가 놓였다. 안개 속 겹겹이 펼쳐진 ‘산’ 벽화 앞에는 용 머리 모양으로 장식한 고려시대 금동 보당(寶幢·사찰에서 의식용으로 깃발을 매달아두는 장대)이 우뚝 서 있다.

‘파스텔의 마법사’로 불리는 스위스 작가 니콜라스 파티(44)가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에 펼쳐놓은 초현실적 풍경이다. 미술시장에서 수십억원에 거래되는 동시대 인기 작가가 한국에서 여는 첫 개인전이 지난 31일 개막했다. 지난해 김환기 회고전으로 재개관한 호암미술관이 고미술 아닌 현대미술 기획전을 여는 것도 처음이다. 작가의 기존 회화와 조각 48점, 신작 회화 20점을 비롯해 파스텔로 그린 대형 벽화 5점을 리움의 고미술 소장품과 함께 선보인다.

니콜라스 파티가 파스텔로 그린 대형 벽화 '나무 기둥' 앞에 파티의 2019년작 '버섯이 있는 초상'이 걸려 있다. /호암미술관

전시 제목은 ‘더스트(Dust)’. 가루가 날리며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파스텔 고유의 연약하고 일시적인 속성을 인간과 문명, 자연의 지속과 소멸에 대한 사유로 확장했다. 전시가 끝나면 ‘공기 속 먼지’로 사라질 벽화의 운명을 상징하기도 한다. 6주 동안 용인에 머물며 미술관 벽에 그림을 그린 작가는 “(전시가 끝나면 지워야 하는) 벽화의 일시성이 마음에 든다. 인간은 ‘흙에서 흙으로, 먼지에서 먼지로’ 돌아간다는 구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했다.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들이 니콜라스 파티가 로비 중앙계단 벽에 그린 벽화 '폭포'를 바라보고 있다. /뉴스1

미술관에 들어서면, 붉은 돌산 사이로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를 정면에서 맞닥뜨린다. 로비 중앙계단 벽에 그려진 벽화 ‘폭포’다. 중세 회랑 건축의 느낌을 살린 미로 같은 전시장에서 깊고 푸른 동굴과 핏빛 나무 기둥, 동양의 산수화를 닮은 산과 잿빛 구름 벽화가 관람객을 신비하고 낯선 세계로 안내한다.

니콜라스 파티의 2020년작 '빨간 꽃이 있는 초상'(왼쪽)이 걸려 있고, 오른쪽에 있는 아치문을 통과하면 '곤충이 있는 조각'(2019)을 만날 수 있다. /호암미술관

안개 속 겹겹이 펼쳐진 ‘산’ 벽화 앞에 용머리로 장식한 고려시대 금동 보당이 우뚝 서 있다. 용이 금방이라도 하늘로 솟구쳐 벽화 속으로 들어갈 듯한 상상을 일으킨다. /호암미술관

특히 이번 전시는 리움미술관이 소장한 고미술품을 병치해 의미가 풍성해졌다. 어둠 속 미지의 공간이자 어머니의 자궁 같은 ‘동굴’ 벽화 앞에 조선 백자 태항아리를 함께 설치해 인류의 근원과 생명의 탄생을 교차시켰다. 산수화처럼 맑게 펼쳐진 ‘산’ 그림 앞에서 기세등등하게 서 있는 금동 보당의 용은 금방이라도 하늘로 솟구쳐 벽화 속으로 들어갈 듯한 상상을 일으킨다. 작가는 “기획 초기 단계부터 리움의 현대미술 소장품이 아닌 고미술 소장품에 초점을 맞춰 함께 전시하기로 했다”며 “작년 방한했을 때 리움미술관 상설전과 수장고 작품을 둘러보고, 미술관 측과 상의하며 고른 작품들”이라고 했다.

니콜라스 파티, '사슴이 있는 초상'(2024). 초상화 속 인물을 에워싼 사슴은 리움 소장품 '십장생도 10곡병'에 그려진 장수의 상징물을 차용했다. /호암미술관
니콜라스 파티, '청자 주자가 있는 초상'(2024). 리움미술관 소장품인 '청자 동채 연화문 표형 주자'를 모델로 그린 초상이다. /호암미술관

작가가 김홍도의 ‘군선도’와 조선시대 ‘십장생도’ 병풍을 재해석해 그린 상상 속 신선 초상들도 눈길을 끈다. 초상화 속 인물의 몸을 사슴으로 뒤덮거나, 복숭아와 연꽃 가득한 화면으로 채웠다. 파티의 사계절 풍경화는 불로장생의 염원을 담은 ‘십장생도’와 함께 전시해 끝없이 순환하고 흐르는 자연의 시간을 보여준다.

파티는 유년 시절부터 그라피티를 그렸고, 대학에서 영화, 그래픽 디자인, 3D애니메이션을 전공했다. 파스텔화를 처음 시작한 건 2013년부터. 그는 “피카소의 파스텔 여인 초상화를 보고 충격받아 다음 날 바로 파스텔을 사서 그리기 시작했다”며 “파스텔이 단순히 취미로 그리는 매체 정도로 저평가돼 아쉽다. 벽화를 그리는 몇 주 동안 나는 안료 구름 속에서 춤을 추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니콜라스 파티, '가을 풍경'(2024). 리넨에 소프트 파스텔. /호암미술관
니콜라스 파티, '여름 풍경'(2024). 리넨에 소프트 파스텔. /호암미술관

작품 곳곳에 차용한 미술사 속 상징과 의미를 찾아내는 ‘발견의 기쁨’도 맛볼 수 있다. 고대부터 근현대를 아우르는 미술사의 다양한 작가, 모티브, 양식, 재료 등을 자유롭게 샘플링해 그만의 독자적인 이미지로 탈바꿈시켰다. 입구의 ‘폭포’ 벽화는 19세기 사실주의 화가 구스타브 쿠르베의 폭포 그림을, ‘주름’과 ‘곤충’ 연작은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브론치노의 해부학적 묘사와 17세기 플랑드르 화가 얀 반 케셀 1세의 그림에서 차용한 식이다.

곽준영 전시기획실장은 “미로와 같은 전시장에서 아치문을 통과할 때마다 만나는 낯선 무대, 동서고금의 문화적 상징들이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교차하며 상상을 자극할 것”이라고 했다. 전시는 내년 1월 19일까지. 관람료 성인 1만4000원.

로비 중앙계단에 그린 '폭포' 벽화 앞에 서 있는 니콜라스 파티. /호암미술관

☞니콜라스 파티(44)

스위스 로잔 출생으로 뉴욕에서 활동 중이다. 18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이후 잊힌 파스텔화의 전통을 재해석해 건축적인 스케일로 파스텔 벽화를 만든다. 6주간 용인에 머물며 작업하면서도 주말엔 반드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갓 태어난 딸을 그린 ‘아기’ 그림도 전시장에서 볼 수 있다.

니콜라스 파티, '아기'(2023). 갓 태어난 작가의 딸을 동판에 유채로 그렸다. /허윤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