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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한국 고미술

정선 - 성류굴 30*25cm

by 주해 2022. 11. 5.

2016-06-30 22:15:00

 

산을 품은 강가에 거대한 암산이 우뚝 솟아있다. 짙게 드리운 수직준과 화면에 부여한 크기로 보아 엄청난 높이의 거대한 절벽임이 분명해 보인다. 먹으로 힘차게 찍어 내린 절벽 아래에는 작게 펼쳐낸 둔덕의 송림과 좌우로 뚫려있는 두 개의 동굴이 있으며, 넓은 공터와 함께 우측으로 트여진 행로가 존재한다.


전반적으로 극적인 구도와 장쾌한 필선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겸재가 그려낸 경상북도 울진군에 위치한 성류굴의 정경이다. 한국의 가장 유서 깊은 동굴 중 하나인 성류굴은 2억 5000만 년 전부터 조성된 곳으로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구에 의해 굴 앞 성류사가 소실되자 안치되어 있던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이곳에 옮기면서 성불이 흐르는 장소로 알려졌으며, 전란을 피해 동굴로 몸을 숨긴 500여명의 백성들이 입구를 막아버린 왜군에 의해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불심어린 이야기와 신묘하게 솟아오른 동굴의 외형, 내부의 신비로운 절경으로 하여금 예로부터 많은 탐방객이 몰려들었고 그 기록의 시작은 고려 말의 학자 이곡李穀이 집필한 관동유기關東遊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벼랑바위는 절벽으로 천 척千尺이나 솟아 있고 절벽에 작은 구멍이 있으니 성류굴이라 부른다. 굴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으며 또한 어두워 불을 밝히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 (중략) ? 자연이라고 생각한다면 어찌 그 임기응변하는 기교가 이와 같이 지극하단 말인가. 일부러 했다고 생각한다면 비록 귀신의 공력이 천만년에 다한다 한들 또한 어떻게 이런 극치를 이르겠는가.

 


- 관동유기 中

 

작품은 겸재의 진경답게 실제 성류굴과 흡사한 면모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암산을 부벽준으로 짙게 뻗어놓고 산봉우리와 동굴입구만 송림을 채운 점과 왕피천을 품은 중, 원경을 피마준으로 토산처리한 점이 그러하다. 다만 주제의 부각으로 형태적인 부분이 실제와 다른데, 이러한 형태감은 간송미술관 소장 ‘성류굴’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제작시기는 겸재의 여타 작품처럼 뚜렷하게 적혀있지 않아 명확한 파악은 어려우나 겸재가 59세에 그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내연삼용추1734’에 백문인 ‘겸재謙齋’가 찍혀있다는 점, 1733년부터 2년간 청하현감으로 부임해 집무를 보던 곳이 경상북도로 지역이 같고 포항 인근과 성류굴이 근접한 거리였던 정황으로 미루어 1730년대 중반, 겸재의 나이 환갑 즈음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작품의 보존 상태는 비단 위에 그려져 오랜 시간동안 수직으로 몇 올의 결손이 있으나 전반적인 상태가 좋고 특히 여백 속 먹감이 완연하다.
전국을 두루 여행하고 사생하며 그 사용한 붓으로 무덤을 이룰 정도라던 30년 지기 조영석의 말처럼, 겸재는 평생을 그림에 바쳤고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250년이 지나 수많은 작품이 소실되어 현재 겸재의 진경이라 부르며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부디 조선의 화성 겸재가 남긴 유산을 감상하고 추가적인 연구에 보탬이 되길 바라며 정선이 그려낸 또 다른 진경산수 한 점을 소개한다.

 

 

겸재는 단지 실경을 많이 그리고 잘 그려서 위대한 것이 아니라, 실경의 시감을 새로운 기법을 통하여 정식화 하고 화법화 하였기에 위대하다.


- 이동주

 

 

작품수록처

참고문헌
겸재 정선 붓으로 펼친 천지조화(국립중앙박물관, 2009), p.106, pl.16.
겸재 정선 1(최완수, 2009), pp.290~291.
繪? 四十一 大謙齋(韓國民族美術硏究所, 2004), p.79, pl.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