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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미술/근현대 미술

0.5배속으로 보기

by 주해 2022. 12. 22.
 

[백영옥의 말과 글] [246] 0.5배속으로 보기

백영옥의 말과 글 246 0.5배속으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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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에는 첫 과제로 악명 높은 유명한 미술사 수업이 있다. 지역 박물관에서 그림이나 조각 작품을 딱 하나만 선택해서 3시간 동안 감상하는 것인데, 이때 이메일과 일체의 소셜 미디어 확인은 금지다. 이 과제의 목적은 ‘의도적인 천천히 보기’다.

나는 한때 시간을 15분 단위로 나눠 썼다. 참고용 영상을 종종 1.5배속으로 봤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해 안달 난 생산 강박증 환자였다. 내가 이 패턴에서 벗어난 건 코로나로 많은 일이 취소나 연기된 탓이었는데, 어느 날 나는 0.5배속으로 동영상 하나를 봤다. 우연히 잘못 맞춰진 설정 탓이었다.

처음 내 눈에 보인 건 표고버섯의 주름 패턴이었다. 연달아 버섯이 핀 나무 밑동을 걸어가는 딱정벌레의 발가락이 보였다. 가장 놀란 건 버섯을 따는 여자의 손가락과 날아다니는 벌의 우아함을 본 것이었다. 몇 개의 영상을 이런 방식으로 보았더니 아기의 눈동자에 비친 전등갓까지 볼 수 있었다. 0.5배속의 세상에선 많은 것들이 ‘다르게’ 보였다.

세상 모든 것들엔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 꽃도 계절도 피고 지는 속도가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효율성’이라는 속도에 맞추느라 자연스러운 몸의 리듬을 놓친다. 일을 빠르게 처리할수록 일이 더 많아지는 역설에 시달리면서 말이다. 산티아고 순례 길에서 느낀 건 멀리, 오래 가려면 자신의 속도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고속도로에도 구간마다 휴게소가 존재한다. 피곤하거나 과속했다면 적당한 곳에서 쉬어야 한다.

삶이란 스스로의 속도로 자신만의 풍경을 얻는 과정이다. 그제야 마음이 번잡할 때마다 내가 산책을 나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빠른 세상에서 내게 휴식을 주는 게 ‘걷는 속도’로 바라본 풍경이었던 것이다. 기차에서 책이 더 잘 읽히는 이유도 그 리듬이 책을 읽는 내 속도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겐 고유의 리듬이 있다. 분명한 건 속도를 늦춰야 비로소 보이는 ‘사각지대’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필요가 아닌 내 필요에 종종 보폭을 맞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