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중건
일제에 의해 훼손된 경복궁을 복원하는 작업을 테마로 한 특별전 ‘고궁연화’가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어요. 조선 시대 세워진 궁은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경희궁 등 5곳이 있어요. 그중 경복궁은 궁중의 공식 행사를 치르는 가장 으뜸인 궁궐로 ‘정궁(正宮)’ 또는 ‘법궁(法宮)’이라고 부르지요. 지금도 연간 국내외 관광객 1000만명이 찾는 우리나라 대표 문화유산이에요.
경복궁은 조선 건국 3년 뒤인 1395년(태조 4년)에 건립됐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는 경복궁은 그때 것이 아니라 조선 말인 1865~1867년 다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해요. 불과 150년 남짓밖에 안 된 것이지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조선일보DB 현재 경복궁 모습
◇270년간 폐허로 있던 궁궐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왕의 조상을 모시는 ‘종묘’와 왕실 가족이 머물고 신하들이 일하는 ‘궁궐’을 짓는 일이었어요. 궁궐 공사는 태조 3년인 1395년 시작해 10개월 만에 끝났답니다. 경복궁엔 왕족·신하 등 3000여 명이 머물거나 드나들었대요.
그런데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은 완전히 불타 버렸어요. 일본군이 불을 질렀다는 설도 있지만, ‘선조수정실록’에는 임금이 피란을 떠난 뒤 백성들이 임금에 대한 분노로 불을 질렀다는 기록이 나와요.
그 뒤로 270년 동안 경복궁은 폐허로 남아 있었어요. 워낙 규모가 커서 복구하려면 인력이나 물자가 너무 많이 들어 역대 임금들이 엄두를 못 낸 거예요. 임금들은 경복궁은 터로 남겨두고 대신 창덕궁에 머물렀어요.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고종때 중건한 경복궁 모습을 그린 조감도
◇왕실 권위 세우기 정책
1863년 26대 고종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어요. 당시는 순조·헌종·철종 3대 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 풍양 조씨 같은 특정 가문이 권력을 잡았던 ‘세도 정치’가 계속되면서 왕권이 크게 약화된 상황이었어요. 고종의 친아버지로서 권력을 쥐게 된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되살리는 정책을 적극 추진했죠. 그중 하나가 바로 경복궁을 중건(重建·왕궁 등을 보수하거나 고쳐 지음)하는 것이었어요.
문제는 흥선대원군이 기존 경복궁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었어요. 태조가 처음 경복궁을 지을 땐 각 건물의 가로 길이를 다 합해서 390칸(약 955m) 규모였고, 이후 조금씩 증축돼 임진왜란 직전까지 5000칸(약 1만2250m) 정도였어요. 그런데 고종은 처음의 18배가 넘는 7225칸(약 1만7700m)으로 사상 최대 규모 궁궐로 중건하고자 했어요.
위키피디아 고종의 친아버지 흥선대원군
◇백성에게 강요한 ‘원납전’
규모가 커도 나라 재정이 튼튼했으면 큰 무리 없이 지을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공사 시작 3년 전에 전국 농민들이 지방 관청의 무거운 세금 징수에 반발한 ‘임술민란’이 일어났을 정도로 당시 국가 재정은 바닥난 상태였어요. 나라에 돈이 없으니 자꾸 세금을 거둬들인 거죠. 그런 상황에 고종은 그 큰 궁전을 3년 안에 속도전으로 짓겠다고 나선 거예요.
중건 예산은 약 750만냥이었어요. 지금 돈으로 5000억원대에 이르는 엄청난 금액이죠. 당시 총 유통 화폐의 75%를 차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종은 모든 백성들에게 원납전(願納錢)이란 기부금을 받았어요. ‘원해서 내는 돈’이란 이름과 달리 사실상 세금이었죠. 1만냥 이상 내는 사람에겐 관직을 주기도 했어요. 백성들이 공사에 끌려가는 일도 많았습니다.
원납전은 왕실 내탕금(임금 개인 돈) 11만냥과 합쳐 모두 773만냥이 모였어요. 이것으로도 모자라자 1866년 액면가가 높은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했지만, 이 때문에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어요. 한마디로 경복궁은 백성의 고혈(膏血·기름과 피)로 중건한 것과 다름없었어요. 백성들은 그 한(恨)을 ‘경복궁 타령’이란 민요로 만들었죠. 여기엔 ‘경복궁 역사(役事·공사)가 언제나 끝나/그리던 가속(家屬·가족)을 만나나 볼까’라는 가사가 나와요.
◇고종, 궁궐 건축의 ‘3종 세트’ 완성했다고?
1868년 마침내 고종은 완성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겼어요. 건물은 훌륭하게 완성됐지만, 고종은 경복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대요. 원래 고종의 침전은 근정전 뒤쪽인 강녕전이지만, 입주 5년 만인 1873년 궁 안에 건청궁이라는 작은 궁전을 따로 지어 거기서 살았어요. 아버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돼요.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고,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납니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이듬해 거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어요. 그다음 해 고종은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했는데,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덕수궁(당시 이름은 경운궁)에 머물렀어요. 일본에 처참히 짓밟힌 경복궁을 떠나 일본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였지요.
경복궁 대신 사실상 정궁 역할을 한 덕수궁엔 이때부터 대부분의 전각이 세워졌어요. 사실상 새로 궁궐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죠. 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도 지어 근대화 의지를 보였어요.
고종은 재위 기간에 대·중·소(경복궁·덕수궁·건청궁)의 ‘궁궐 3종 세트’를 모두 지은 셈이에요. 이에 대해 급변하는 대외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경제력과 국방력 강화에 힘써야 할 시점에 궁궐 건축에 지나치게 많은 돈과 시간을 썼다는 비판도 나와요. 대한제국은 수립 13년 만에 막을 내렸고, 덕수궁 석조전은 나라가 망한 지 석 달 남짓 지난 1910년 12월에 완공됐습니다. 석조전에서 거처하려던 고종은 정작 건물이 완성되자 “서양식으로 생활하려니 영 불편하다”고 했다네요.
[2045년까지 계속되는 경복궁 복원]
고종이 지은 경복궁은 1910~1945년 일제에 의해 또 훼손됐어요. 전각 4000칸이 헐려 민간에게 팔렸고, 1917년 창덕궁에 불이 나자 경복궁 전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창덕궁 전각을 지었죠. 1990년 당시 경복궁은 고종 때 건물 500동 중 근정전·경회루·향원정 등 겨우 7%만 남았습니다. 정부는 1991년부터 경복궁 복원 사업을 시작했어요. 지금까지 26%의 전각이 복원됐어요. 2045년까지 총 5170억원을 들여 고종 때 건물 40%까지 복원하는 게 목표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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