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7 09:10:45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1/08/17/MSKDVU3K6JFG7G7B2NBYM7WOCU/
자크-루이 다비드, 성모자께 간청하는 성 로크, 1780년, 캔버스에 유채, 260×195㎝, 마르세유 미술관 소장.
1720년 남프랑스 항구도시 마르세유에 흑사병이 상륙했다. 중동과 아프리카, 아시아로부터 유럽에 이르는 길목이었던 만큼 마르세유에서 전염병이 시작되면 온 유럽으로 퍼지는 건 시간문제.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바로 지난주 지면에서 소개했던 루벤스 그림 속 흑사병 환자의 수호성인 성(聖) 로크가 수백 년 세월을 거슬러 사람들 눈앞에 다시 나타나 병든 자들을 치유했던 것이다. 늘 흑사병의 위협에 시달리던 시(市)에서는 1780년, 이 놀라운 기적을 되새기고자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1748~1825)에게 제단화를 주문해 당시 격리 시설이던 나자로 예배당에 뒀다.
다비드는 루벤스의 그림을 참조해 세로로 긴 화면을 반으로 나눠 하단에는 환자들을 묘사하고 상단에는 성모자에게 자비를 간청하는 성 로크를 그렸다. 그런데 루벤스의 환자들이 희망에 부풀어 성인과 예수를 올려다보는 반면, 다비드의 환자들은 고통과 절망에 몸부림치며 그림 밖을 쏘아본다. 그러고 보니 고운 옷을 입고 높은 자리에 앉은 성모마리아는 아기를 어르느라 여념이 없고, 그런 엄마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아기 예수는 거친 맨발 바람에 간절히 두 손을 모으고 올려다보는 성 로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과연 누가 기적을 믿겠는가.
이 그림은 다비드가 처음으로 공식 의뢰받은 대작이었다. 그는 머지않아 프랑스 최고의 화가가 됐고, 대혁명이 일어나자 왕정과 종교를 포함한 모든 낡은 질서를 철폐하는 데 적극 가담했다. 그 후 다비드는 더 이상 성화를 그리지 않았다. 다비드의 첫 종교화는 이처럼 역설적이게도 종교화의 종말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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