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09 13:10:18
작품설명
19세기 후반 조선은 외교관계 수립의 물꼬를 트면서 국기 제정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특히 1875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그 이전엔 뚜렷하지 않았던 국기에 대한 개념과 인식을 갖게 되었으며 이후 1880년부터 국기 제작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맺는 과정 중 조선 깃발 형태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가 시작되었고 이듬해 1883년 조선의 태극기가 공식적으로 공표되었다.태극기의 제작 과정과 그 시초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조미 수호 통상 조약 당시 역관으로 활동했던 이응준이 창안한 이른바 ‘이응준 태극기’와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으로 향할 때 제작했다는 ‘박영효 태극기’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 두 태극기는 실물이 전해지지 않지만 이응준 태극기의 원형은 미국 상원에서 1882년 7월에 발행한 『Flags of Maritime Nations』라는 책에 실린 도판으로 확인이 가능하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으며(참고도판1), 박영효가 제작한 태극기는 1882년 11월 일본 외무성의 요시다 기요나리吉田淸成가 주일 영국공사 해리 파크스에게 보낸 문서에 수록된 것을 그 근거로 하고 있다(참고도판2). 이 두 태극기를 비교하면 감, 곤과 건, 리의 위치가 좌우로 바뀌어 있는 것이 다르다. 이후 조선이 공식적으로 반포한 태극기는 1884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 제작한 국기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참고도판3)출품작은 정성스럽게 재단한 고급 비단에 태극과 4괘가 단단한 실로 엮인 작품이다. 4괘의 위치는 박영효 태극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태극기와 같을 뿐 아니라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실물 태극기로 알려진 쥬이 태극기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소장 그리고 작년에 보물로 지정된 데니 태극기보물 제 2140호와도 동일하다. 이들 작품은 태극의 모양, 크기와 배치 등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특정 기준작을 바탕으로 한 출품작의 연대를 논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다만 태극기의 크기가 국왕이 사용했던 어기처럼 정방형인 점과 제작에 사용된 고급 재료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왕실에서 사용되었을 태극기일 수도 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왕실에서의 사용된 1897년 황제 즉위식의 상황을 보도했던 독립신문 기사 중 “… 어가 앞에는 대황제의 태극국기가 먼저 지나갔고, 대황제는 황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금으로 채색한 연을 탔다. …”광무 원년 10월 14일는 내용에서 확인이 가능하며, <신축진찬도병>1901등과 같은 왕실 기록화에서도 그 사용을 볼 수 있다. 출품작과 같은 비단에 제작된 태극기의 예는 찾아보기 어렵고 이를 민간에서 사용했을 가능성 또한 적다. 현재 왕실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태극기는 현재까지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유물로 평가되며 우리나라 태극기의 원형을 밝히는 연구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여겨진다.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한지 올해로 77주년이다. 태극기는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국기로 오늘날 세계에 당당히 알려졌다. 제작 과정에서부터 개입된 외세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국기 제작에 대한 선현들의 자주적인 판단과 의지, 그리고 일제 탄압 속 우리나라 독립을 위한 열사들의 타오르는 애국심과 투지가 그 바탕이 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국기를 보며 마음 한 켠이 뜨거워지는 것은 급변하는 정세와 복잡하고 암담했을 국난 속에서도 그들이 품었던 우리나라의 밝은 희망과 긍지가 여전히 울림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문헌
한철호,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박영효 태극기’ 1882)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제작국기(1884)의 원형 발견과 그 역사적 의의,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008
목수현, 근대국가의 ‘국기’라는 시각문화–개항과 대한제국기 태극기를 중심으로, 미술사학보 27, 2006
참고도판
1. 『Flags of Maritime Nations』 수록 태극기, 1882.
2.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소장 문서 수록 태극기, 1882.
3.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태극기, 18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