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 '탄생(신의 아들)', 1896년, 캔버스에 유채, 96cm × 126cm, 뮌헨 노이에 피나코텍 소장.
1891년 프랑스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1848~1903)이 처자식을 다 버리고 남태평양의 섬 타히티로 떠났다. 파리에서 주식 중개인이자 미술상으로 큰돈을 벌며 남부럽지 않게 살다, 주가 폭락으로 하루아침에 직업을 잃은 다음 전업 화가가 된 지 십 년이 채 못 됐을 때였다. 순식간에 빈곤의 수렁으로 빠져든 고갱은 타히티가 바로 인생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지상낙원이라고 믿었다. 동료 화가들에게는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 만능주의와 오랜 관습에 찌든 삶에서 더 이상 인간 본연의 영적인 힘을 되살릴 수 없다고 일갈하고 떠났다. 물론 프랑스 식민지가 되어 이미 개발이 될 대로 된 타히티가 지상낙원은 아니었지만, 고갱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그리고 싶은 것만 그렸다.
후광을 두른 여인과 갓난아기가 천사의 보호를 받으며 황소가 있는 마구간에 누워 있는 이 그림은 영락없는 예수 탄생의 장면이다. 다만 인물들의 검은 피부와 곳곳을 장식한 원색의 문양들이 낯설게 여겨질 뿐. 고갱은 타히티에 머무는 동안 이처럼 전형적인 기독교 도상에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 문화를 가미해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국적인 그림을 그려 유럽에서 판매하고자 했다. 지상낙원에 살아도 거래는 자본주의적으로 해야 하는 법. 그러나 그마저도 녹록지는 않았다.
사실 그림 속 여인과 아기는 고갱이 타히티에서 얻은 어린 아내와 자식이었다. 아기는 불행히도 생후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고갱은 그 뒤로도 자식을 더 낳았다. 타히티는 고갱 덕분에 유명지가 됐지만, 정작 고갱이 남긴 후손들은 타히티에서건 유럽에서건 행복하지는 않았다. 굳이 불행의 근원을 찾자면, 주가 폭락인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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