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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미술/서양 미술사

코로나의 선물? 고흐가 마지막 그림 그린 곳 130년만에 밝혀졌다.

by 주해 2022. 11. 29.

"믿을 수 없어요. 한없이 기쁩니다. 화가 반 고흐가 마지막으로 그림을 그린 장소가 이렇게 130년만에 발견됐네요. 반 고흐라는 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입니다."

28일(현지 시각) 파리 북서쪽 외곽 마을인 오베르쉬르우아즈.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동생 테오의 증손자인 벨렘 반 고흐(66)씨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조상인 반 고흐가 130년전 권총으로 자살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그린 '나무뿌리들(원제 네덜란드어 Boomwortels·프랑스어 Les Racines)'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바로 그 나무들 앞에 섰다. 오베르쉬르우아즈는 반 고흐가 생애 마지막 70일을 보낸 전형적인 프랑스 시골 마을이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마지막 작품 '나무뿌리들'

‘나무뿌리들’의 배경인 지점은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있는 기념관인 ‘반 고흐의 집’에서 불과 150m 떨어져 있다. 하지만 그가 숨진 지 130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그곳이 반 고흐가 마지막으로 그림을 그린 곳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떻게 발견됐을까.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가져온 우연 덕분이다. 고흐의 집에서 과학디렉터로 일하는 미술사학자 부터 판데르빈(Van der Veen) 박사가 28일 파리에서 일하는 세계 주요 언론사 기자들을 초청해 ‘나무뿌리들’을 그린 실제 장소를 발견한 과정을 설명했다.

1905년 무렵 '나무뿌리들'의 배경이 된 오베르쉬르우아즈의 도비늬거리 37번지의 사진을 담은 우편 엽서

               1905년 무렵의 엽서 속 사진과 그림 '나무뿌리들'에 나온 부분을 고증을 거쳐 합성한 장면

지난 3월 코로나 사태로 프랑스 정부가 이동 금지령을 내리자 판데르빈 박사는 동부도시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자택에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됐다. 그는 우연히 자신의 컴퓨터 위에 올려둔 우편 엽서에 시선이 꽂혔다. 1905년 전후 오베르쉬르우아즈의 도비늬거리 37번지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은 엽서였다. 나무들 앞으로 자전거를 몰고 가는 젊은이가 있는 엽서의 사진을 보는 순간 판데르빈 박사는 반 고흐의 마지막 작품 ‘나무뿌리들’의 배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사학자 부터 판데르빈 박사가 엽서 속 사진(스크린 왼쪽)과 그림 '나무뿌리들'(스크린 오른쪽) 사이의 유사점을 설명하고 있다

“봉쇄령 때문에 집 안에서만 있다보니까 시야가 좁아지고 사물을 더 자세하게 보게 되면서 우연히 발견한 겁니다. 즉시 그림 ‘나무뿌리들’과 엽서 속의 사진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대조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둘은 놀랍도록 비슷했어요.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지요.”

미술사학자 부터 판데르빈 박사가 그림 '나무뿌리들'(스크린 윗쪽), 엽서 속 사진(스크린 중간), 현재의 모습(스크린 아래쪽) 사이의 유사점을 설명하고 있다

판데르빈 박사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고흐미술관에 이런 발견을 보고했다. 고흐미술관은 고(古)식물을 연구하는 네덜란드 수목학자 베르트 마에스 박사에게 판데르빈 박사의 발견을 검증해달라 부탁했고, 마에스 박사 역시 “엽서 속 사진과 그림 ‘나무뿌리들’이 매우 유사하다”는 결론을 냈다.

            엽서 속 사진과 반 고흐가 '나무뿌리들'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각도와 장면을 합성한 그래픽

판데르빈 박사는 지난 5월 봉쇄령이 풀리자마자 오베르쉬르우아즈에 달려가 엽서 속 사진의 지점을 확인하는 작업을 거쳤다. 현재의 나무 및 그루터기 모습, 엽서 속 사진, 그림 ‘나무뿌리들’ 등 3가지를 비교한 결과 모두 같은 곳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반 고흐가 숨진 지 130년을 맞아 28일 널리 공개한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후손 빌렘 반 고흐(66)씨. 반 고흐의 동생 테오의 증손자다

‘나무뿌리들’이 고흐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근거는 반 고흐의 동생 테오의 매형인 화가 안드리스 봉거가 “반 고흐가 죽기 직전 오전에 나무 아래 초목을 그렸다”는 기록을 한 편지에 남겼다는 데 있다. 미술사학자들은 ‘나무뿌리들’이 미완성 그림이라고 말한다.

                      그림 '나무뿌리들'의 실제 배경. 반 고흐의 사후 130주기를 맞아 28일 공개됐다

반 고흐가 숨질 때 머무르던 오베르쉬르우아즈의 라부(Ravoux) 여인숙은 기념관 ‘반 고흐의 집’이 소유하고 있다. 판데르빈 박사는 ‘나무뿌리들’의 배경인 지점 외에도 최근 라부여인숙 주인 아르튀르 라부의 맏딸인 아델린 라부의 1953년 라디오 인터뷰도 최근 발견했다. 아델린은 인터뷰에서 반 고흐가 숨진 1890년 당시 13살이었던 자신이 반 고흐의 방에 식사를 가져다준 이야기를 비롯해 반 고흐가 자살을 시도하기 직전의 모습을 증언했다.

도미니크-샤를 얀센 고흐의 집 관장(맨 왼쪽), 빌렘 반 고흐(오른쪽에서 세번째), 부터 판데르빈 박사(오른쪽에서 두번째), 에밀리 고르뎅커 암스테르담 고흐미술관 관장(맨 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