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에 갇힌 인간의 몸부림… 1세대 추상화가의 60년 예술 세계
김봉태, '축적 2023-23'(2023,). 빛을 투과하는 재료인 플렉시글라스를 사용해 깊이감과 공간감을 더했다. /가나아트
버려진 종이 상자가 그의 그림에서 해체돼 자유를 얻었다. 강렬한 원색 상자들이 춤추고, 날고, 납작하게 펼쳐진 채 해방의 꿈을 꾼다.
한국 추상미술 1세대를 대표하는 화가 김봉태(87)는 20년 넘게 상자를 주제로 작업하고 있다. 어느 날 집에 오는 길, 골목에 버려진 박스가 너저분하게 쌓여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 삶을 떠올렸다. “인간들도 상자처럼 고정된 틀에 갇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틀을 깨고 자유를 발산하려는 인간의 몸부림을 표현하고 싶었다.”
한국 추상미술 1세대를 대표하는 화가 김봉태. /고운호 기자
올해 36회 ‘이중섭 미술상’ 수상 작가인 김봉태의 화업 60년을 반추하는 회고전이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회고전 이후 8년 만에 갤러리에서 처음 열리는 회고전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올해 신작까지, 기하학적 추상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 온 작가의 작품 세계를 시대별 연작 40여 점으로 소개한다. 1970년대 ‘그림자’ 연작, 1980~90년대 ‘비시원’ 연작, ‘창문’ 연작에 이어 2000년대부터 정진해 온 ‘상자’ 시리즈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오광수 미술평론가는 “현대인의 생활 공간에 차고 넘치는 것이 박스다. 과자 상자, 음료수 상자, 화장품 상자, 약품 상자 등 헤아릴 수도 없고, 우리의 주거 공간인 아파트, 대형 건축들도 상자 형태이니 박스가 없는 현대 도시는 상상할 수도 없게 됐다”며 “김봉태의 열린 상자들은 ‘춤추는 나의 모습에서 자유의 황홀한 경지가 보이지 않는가’ 하고 우리를 향해 외치고 있는 것 같다”고 평론을 썼다.
‘상자’ 연작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초기의 ‘춤추는 상자’, 2010년대부터 선보인 ‘축적’에 이어 신작 ‘펼쳐진 상자’와 ‘플라잉 상자’가 처음 공개됐다. 그동안 상자를 분해하고 재조립했던 작가는 ‘펼쳐진 상자’에서 상자의 본질을 시각화하는 데 집중했다. 분해한 상자를 물에 담가 두었다가 꺼내서 상자의 결을 따라 한 장씩 뜯어내 캔버스 위에 다시 붙이는 작업이다.
김봉태, '플라잉 상자 2023-48'(2023·왼쪽)와 '춤추는 상자 2023-11'(2023). /가나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