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30 08:17:17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30/2020063000112.html
[218] 갑오년 조선 관비유학생 甲午年 朝鮮 官費留學生
교복을 입은 청년들이 단체 사진을 찍었다. 맨 앞줄 가운데에 실크해트(silk hat)를 쓴 사람이 보인다. 의화군(훗날 의친왕) 이강으로 추정된다. 둘째 줄 왼쪽에는 흰 한복을 입은 여자가 한 사람 보인다. 이름은 김란사(金蘭史)다. 이 사진은 사학자 고혜령이 서울대 도서관에서 찾아낸 사진이다. 고혜령은 김란사 평전 ‘꺼진 등에 불을 켜라’ 저자다. 김란사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하기로 한다.
사진 위쪽에는 '대조선인 일본 유학생 친목회'라고 적혀 있다. 아래에는 '건양 원년 1월 6일 공사관 내 촬영'이라고 적혀 있다. 건양 원년은 1896년이다. 그해부터 조선은 양력(陽曆)을 썼다. 이 학생들은 1894년 시작된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일본으로 파견된 관비(官費·국비) 유학생이다.
사진을 찍고 한 달 닷새 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갔다. 그날 개혁 정부 총리대신 김홍집은 청계천에서 맞아 죽었다. 아관파천 이후 이 조선 학생들 유학 생활은 만신창이가 됐다. 귀국 후 인생도 뒤죽박죽이 됐다. 정쟁(政爭)과 무책임 한가운데에 내버려진 조선의 마지막 기회 이야기.
갑오정부의 유학 구상
1894년 청일전쟁이 터지고 조선에 김홍집 내각이 들어섰다. 일본 힘으로 개혁을 하려던 김홍집 정부는 그해 11월 부임한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주선으로 관비 유학생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에 앞서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 또한 의학·상업·군사 유학생을 계획 중이었다.(1893년 10월 31일 '윤치호일기') 게이오대 설립자인 일본 석학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이들 교육 실무를 준비했다. 1895년 2월 학부대신 박정양이 유학생 모집 공고를 걸었다. 양반가 자제 114명이 선발됐다.
1895년 김홍집 정부에서 일본으로 보낸 국비 유학생 모임 ‘대조선인 일본 유학생 친목회’ 단체 사진. 촬영 날짜는 1896년 1월 6일이고 장소는 주일 조선 공사관이다. 앞에서 둘째 줄 왼쪽의 한복 입은 여자는 훗날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김란사(金蘭史)다. 가운데 실크해트를 쓴 사람은 당시 일본 유학 중이던 의화군(훗날 의친왕) 이강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발행한 국한문 혼용 잡지 ‘친목회 회보’ 2호는 ‘1월 6일 수요일 오전 10시 의화군 전하와 공사관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잔치를 열었다’고 적고 있다. 유학생들은 촬영 한 달 뒤인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터지며 정부 지원이 축소되거나 끊겨 학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조선으로 송환됐다. 이후 인생은 저마다 파란만장하고 기구했다.
박정양이 이들에게 말했다. "일신의 사사로움을 잊고 나라를 사랑하여…"('친목회 회보'1, '학부대신 훈시') 이들은 1895년 4월 2일 내부대신 박영효 배웅을 받으며 한복 차림으로 일본으로 출발했다. 한 달 뒤 2차로 선발된 유학생 26명이 일본에 도착했다.(박찬승, '1890년대 후반 관비 유학생의 도일 유학', '근대교류사와 상호인식1', 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 2001, p80) 두 달 후 후쿠자와 유키치는 "군주에게 보답하고 국민에게 베풀어 동아시아의 존안(尊安)을 도모하라"고 이들을 격려했다.('친목회 회보'1호, 1895년 윤5월 14일 '친목회일기')
가난한 한 나라가 교육 예산(12만6752원)의 31%(4만426원)를 들여 총명한 청년들을 부강한 옆 나라로 보냈다.(1895년 11월 15일 '일성록') 완결되면 나라를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혁명적인 기획이었다. 이에 맞게, 유학생들은 이듬해 전원 신식 복식으로 갈아입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게 끝이었다.
아관파천과 유학생
1895년 10월 왕비 민씨가 일본인 무리에게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터졌다. 4개월 뒤인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도주했다. 갑오 정권 실권자들은 민씨 살해 배후자로 낙인이 찍혔다. 총리대신 김홍집과 탁지부대신 어윤중은 길거리에서 맞아죽었다. 모든 것이 변했다.
이후 조선 정부는 학비 지원과 중단을 반복하며 주일 공사관과 유학생들을 힘들게 만들었다. 공식 훈령은 '종전과 동일하게 학업에 열중하라'였다. 변함없었다.(1896년 2월 21일 '마이니치신문', 마스타니 유이치, '갑오개혁기 도일 유학생 파견 정책의 전개와 중단 과정', 한국사학보 56호, 2014) 하지만 이들은 어느새 '역적의 손에 의해 파견된 유학생'(유학생 어담 회고록)이며 '망명 한인들과 접촉한 불온한 사람들'('일본 외무성 기록', 메이지 33년 12월 8일 '재마산 영사가 아오키 외무대신에게', 이상 박찬승, 앞 책 재인용)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대실패로 끝난 유학 프로젝트
1896년 4월 7일 갑신정변 주역 서재필이 미국 망명 생활을 접고 귀국해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1898년 '독립협회'가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독립신문은 유학생 지원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김기주, '아관파천 후 한국정부의 유학정책', 역사학연구 34권, 2008)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뿐 아니라 서양 문명 각국에 신분 고하를 막론한 유학생 100명 파견 계획을 세웠다.(1898년 12월 7일 '독립신문') 이 사실이 보도되고 18일 뒤 정부는 '민권(民權)'과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독립협회를 전격 해산시켜 버렸다. 유학생 계획은 전면 중단됐다.
지원이 끊긴 일본 유학생들은 '학비를 지원받지 못해 사방이 빚이었고, 끼니를 때우느라 진 빚에 공관이 창피함은 물론 외국에 수치스러울 정도였다.'(각사등록 근대편 '학부래거문' 1899년 8월 3일 '외무대신 박제순이 학부대신 민병석에게 보내는 조회') 일본 유학생에 대한 지원은 빚 상환 차원에서 간헐적으로 이뤄지다 1903년 2월 전면 송환령이 내려지며 중단됐다. 밀린 유학 비용은 귀국 명령 14개월 뒤에야 최종 청산됐다.
유학생들의 파란만장한 인생
'정부 지원이 끊긴 가난한 나라 국비유학생'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한 유학생 18명은 1900년 현지에서 대한제국 육군 참위 사령장을 받았다. 봉급은 지급받지 못했다. 그리고 유학을 계속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학비 지급 또한 없었다. 불만을 품은 이들은 망명 중이던 유길준과 쿠데타 계획을 세우다 적발됐다. 1904년 체포된 쿠데타 미수자 7명이 참수(斬首)형을 받았다. 1명은 곤장 100대형을 받았다. 고종 정권과 망명 인사들 정쟁의 희생자였다. 유학생 가운데 6명은 귀국을 거부하고 '친목회' 자금을 들고 미국으로 도주했다. 12명은 사립학교 교사로 취직했다.
변하진, 신해영, 어용선은 독립협회에 참여했다. 1898년 이들은 박영효를 장관으로 추천했다가 역적으로 몰렸다. 같은 유학생 오성모도 함께 체포돼 참수됐다. 변하진은 옥사했다. 처형을 면한 신해영은 일본에서 병사했다. 그가 만든 인쇄소 보성사는 훗날 기미독립선언서를 찍었다. 함께 체포된 안국선은 진도로 종신유배형을 받고 1907년 풀려났다. 이후 그는 고종 정권을 비판한 '금수회의록'을 저술했다.
그녀, 김란사
최초의 관비 여자 유학생 김란사(金蘭史·1872~1919). 3·1운동 직후 북경에서 의문사했다.
김란사는 여자였다. 이미 관비유학생이 파견되기 전 남편 하상기와 함께 일본 유학 중이었다. 유학생이 온다는 소식에 김란사는 당시 학부대신 이완용에게 자신도 포함시켜달라고 청원했다. (각사등록 근대편, '학부래거문'1·4, 1895년 윤5월 2일 '여학생 김란사 관비유학생 대우 조회') 이틀 뒤 청원이 통과됐다.
김란사는 게이오에서 관비로 학업을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1906년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에서 문학사를 취득했다. 미국에서는 의친왕 이강과 교류했다. 그리고 돌아와 이화학당 교사가 되었다. 기숙사 사감, 교감 격인 총학사도 맡았다. 1916년 순회강연을 떠나 정동제일교회에 파이프오르간 설치 기금을 모았다.
1918년 설치된 그 파이프오르간 송풍실에서 유관순과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찍었다. 3·1운동 9일 뒤인 1919년 3월 10일 김란사는 중국 북경에서 동포들과 식사를 한 후 급사했다. 사람들은 그녀 행적으로 보아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다고 믿고 있다.(심옥주, '이화학당 총교사 김란사와 유관순', 유관순연구소 학술대회, 2018) 1995년 대한민국정부는 김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은 그들
이미 나라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많은 유학생이 귀국하고도 취직하지 못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냉대받던 유학생들은 대거 통감부 체제 관료로 변신했다. 요컨대, '조선 측 유학생 정책은 실패했고, 일본의 조선 유학생 정책은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박찬승, 앞 책, p128)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정부 유학생은 5년 만에 1000명을 넘었다. 1872년 청에서 미국으로 보낸 국비 유학생은 120명이었다. 일본 유학생들은 정부 지원 속에 학업을 마치고 귀국해 정부·민간 요직에 취직했다. 청나라 유학생은 10년 뒤인 1881년 '서양에 물들었다'며 전원 소환됐다. 그들이 귀국하고 14년 뒤인 1895년 조선 정부는 일본으로 관비 유학생 140명을 보낸 것이다.〈2019년 4월 17일 '박종인의 땅의 역사 161: 청나라 조기유학생 유미유동(留美幼童)과 청일전쟁' 참조〉
일본은 실리(實利)로 청년들을 보냈고, 청은 이념(理念)에 매몰돼 그들을 소환했다. 조선은 희한할 정도로 맑고 순수한, 정치 논리였다. 청·일·한 3국 무대인 동아시아 질서 재편 과정은 정확하게 그 순서대로 진행됐다. 대조선인 유학생도 대조선도,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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