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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문화 . 시사

다부동 전투 승리·야전군 창설… 韓美동맹까지 일군 위대한 장수.

by 주해 2022. 11. 28.

6·25전쟁과 백선엽

한반도의 싸움은 대개 신의주~평양~개성~서울~대전~대구~부산 축선에서 승패가 갈린다. 인구가 밀집하고 물산이 풍부할 뿐 아니라, 교통의 가장 큰 축선이 지나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6·25전쟁의 큰 싸움도 대부분 여기서 벌어졌다.

느닷없는 남침으로 발발한 전쟁의 가장 큰 축선에 서서 눈부시게 활약한 지휘관은 올해로 100세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다. 대한민국 생사존망이 걸렸던 낙동강 전선 다부동 전투, 북진 뒤 평양 최초 입성, 중공군과 성공적인 조우전, 중공군 치하 서울 탈환이 중요 전적이다. 이어 기동전 방식 중공군 막바지 공세를 꺾었고, 휴전회담 한국군 첫 대표를 역임한 뒤 지리산 일대에 준동하며 유엔군 보급선을 위협하던 빨치산을 근절했다. 곧 육군참모총장에 올랐고, 최초 대장 진급이라는 기록도 수립했다.

미군도 감탄한 '사단장 돌격'

여기까지 그가 보인 역량은 '장군(將軍)급'에 해당한다. 무명에 가까웠던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 한국군 창설 멤버가 전쟁이라는 시공(時空)에서 뭇사람 눈에 처음 두드러진 때다. 그는 1950년 대구 북방 다부동 전선에서 부대가 후퇴하자 그들을 앉히고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고 한 뒤 감행한 이른바 '사단장 돌격'으로 전선의 붕괴를 막고 승리를 일궜다.

아울러 그해 9월 15일 인천으로 상륙한 맥아더의 유엔군 병력을 뒤에서 받쳐주기 위한 전선 북상에서도 큰 전공을 세웠다. 낙동강 전선 부대가 뒤를 받치지 못하면 인천 상륙 유엔군 부대는 고립을 면치 못할 뻔했다. 당시 지독한 교착 상태 전선을 12㎞ 북상시켜 북진의 혈로를 뚫은 주역도 백선엽의 1사단이었다.

이어 트럭 1000대를 보유한 미군 1기병사단과 경쟁해 트럭 100대에 불과한 한국군 1사단이 30여 분 먼저 평양에 도착한 기록은 당시 참전한 미군과 유엔군 모두에게 화제로 떠오를 정도였다. 이로써 그는 70년 전 한반도 싸움에서 가장 뛰어난 '야전군 지휘관'의 명성을 얻는다.

1951년 5월 중공군 5차 춘계 공세에서는 강원도 인제군 현리가 뚫렸다. 이때 백선엽은 강릉 주둔 한국군 1군단을 이끌었다. 중공군은 현리 일대를 돌파한 뒤 강릉을 넘보고 있었다. 그는 미8군의 다급한 명령을 받고 대관령으로 접근하던 중공군 병력을 섬멸해 강원도 본격 점령 기도를 꺾었다.

평양 시가지 진입 앞두고 - 1950년 10월 평양 남쪽 선교리에서 시가지 진입을 앞두고 미 공지(空地) 연락 장교와 작전을 숙의 중인 백선엽 장군.

전투를 지켜봤던 미8군 밴 플리트 사령관에 의해 백선엽은 한국군 최초 휴전회담 대표로 참석했고, 이어 호남선과 경부선 보급로까지 위협하던 지리산 일대 빨치산 토벌 지휘관을 맡아 1951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작전을 성공리에 마무리했다. 이어 미 8군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1950년 11월 와해됐던 국군 2군단을 재건한다. 최첨단 155㎜ 야포로 중무장한 현대적 포병 전력을 모두 지닌 부대였다.

'장군' 아닌 '장수'로서의 활약

그가 이룬 전반기 전적의 의미는 이렇다. 다부동 전투에서는 동유럽을 비롯해 전 세계로 확산일로에 있던 공산주의 진영 기세를 결정적으로 막아섰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황이 대전환하는 길목에서 그의 부대는 낙동강 전선 북상을 통해 북한의 기세를 꺾고 유엔군이 북진할 수 있는 전세를 확고히 했다.

2군단 재창설은 이후 한국군의 발 빠른 성장세를 가능케 한 토대 구축 작업에 해당했다. 이로부터 새 포병 병력을 비롯한 한국군 고위 지휘관의 미국 유학이 본격적으로 이뤄진다. 지리산 일대 빨치산 토벌은 후방의 잠재적 위협을 제거함으로써 아군 전력을 적의 전면에 모두 집중케 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이 같은 전적은 장교와 병사를 거느리고 전선을 누볐다는 점에서 '장군급' 지휘관의 능력이다. 이후 그가 발휘하는 재능과 품격은 다른 차원이다. 전쟁을 큰 차원에서 통어(統御)하는 '장수(將帥)급'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다. 그는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뒤 이듬해 1월 한국군 최초 대장으로 승진한다. 이 무렵 전선 각 고지에서 벌어지는 중공군과 북한군 대상의 격렬하며 참혹했던 고지전을 이끌면서 동시에 지속적인 한국군 현대화 작업에 나선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조인 뒤에 그는 한국군 육군참모총장에서 '강등'당한다. 미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 대장의 권유였고, 그의 자발적인 승낙이기도 했다. 그는 직급이 낮지만 실제 의미가 아주 큰 '제1야전군' 창설과 지휘를 맡는다.

동양 최초 '야전군' 창설

휘하 병력 40만 명으로 경기도 의정부 일대 미군 방어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휴전선을 모두 방어하는 대부대였다. 동양 최초 야전군이었고, 보유한 병력과 무기·장비로 어떠한 형태의 단독 작전이든 수행이 가능했다. 이 야전군 창설은 당시 한반도에 미군이 이끌고 온 모든 무기 체계를 우리 한국군이 승계한다는 의미였다. 당시 미군은 자신의 무기와 장비를 함부로 한국에 넘기지 않으려고 했다. 면밀하게 상대를 파악한 뒤 믿음이 생겼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다.

맥아더 총사령관과 함께 - 1951년 3월 서울을 탈환한 국군 1사단 사령부로 도쿄 유엔군 맥아더 총사령관이 예고 없이 방문해 백선엽 사단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당시 백선엽은 이승만 정부와 미 행정부 사이 갈등 한복판에 있었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의 '국군 단독 북진에 의한 통일' 염원을 잊지 않되, 그 가능성을 현실 토대에서 조율했다. '반공 포로 전격 석방'을 감행, 미국과 갈등 관계에 진입한 이 대통령에 대한 미군의 의심과 견제에도 맞서야 했다.

그는 1953년 5월 미군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여정에서 당시 대통령 아이젠하워에게 단독 면담을 요청해 "전후 미군 철수 뒤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고, 아이젠하워로부터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해도 좋다"는 언급을 받아낸다.

백선엽은 1954년 2월부터 3년 3개월에 걸쳐 제1야전군을 이끌었다. 소총과 105㎜ 야포 등으로 무늬만 갖췄던 전전(戰前) 10개 사단 한국군이 155㎜ 야포와 핵 투사 능력까지 있는 8인치 곡사포 등 현대전 장비를 모두 지닌 20개 사단의 정예 군대로 자리를 잡는 계기였다.

정치와는 거리를 두다

백선엽은 함부로 의중을 내비치지 않으며 오래 인내하는 능력이 있다. 남을 누르는 힘보다 상대를 설득하고 포용하는 역량이 강하다. 싸움터에서 드러내는 '장군'의 맹렬함을 넘어서는 노련함과 인내·끈기, 아울러 상대 힘을 내 힘으로 전환해 국면을 새롭게 바꾸는 능력이다.

36세 때인 1956년 제1야전군 사령관을 이끌다가 이승만 대통령 부름을 받는다. "자네, 내무 장관 맡아보게." 당시 내무 장관은 군수와 도지사, 경찰 등을 모두 관할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3일 뒤 다시 호출받아 간 경무대에서 그는 대통령에게 "아무래도 군복을 입고 평생을 마쳐야 좋겠다"고 했다. 그 이후로도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살았다. 자신이 목숨을 구해 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교통부 장관으로 1년 3개월 일했고, 다시 9년 동안 한국 화학공업을 이끌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을 시작했고, 한국 석유화학 종합단지 14개를 만들었다. 그의 세속적 신앙은 '대한민국의 부국과 강병'이었다.

늘 떠나지 못했던 전쟁터

그는 '장군'이면서 '장수'였던 사람이다. 전쟁에서 적을 막고, 전후에는 미군과 끈질긴 교섭으로 대한민국 안보의 기틀을 다진 그는 어쩌면 '최고의 승부사'라는 지칭이 더 어울린다.

아울러 그는 '영원한 군인'이었다. 90세를 넘겨서도 그는 늘 악몽을 꿨다. 적에게 밀리다가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깨는 꿈이 많았다. 아울러 1960년 이후 10년 동안 해외 주재 대사 시절에도 늘 외국 전쟁터를 버릇처럼 다니곤 했다. 노르망디와 이웃 독일 라인 강변, 브뤼셀 인근 워털루 전쟁터가 프랑스 대사 시절 '단골' 방문지였다. 그는 스스로 영웅이라고 여길까. 백선엽은 "그렇지 않다"면서 "내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용감하게 나아가 전투를 치르다 숨지거나 다친 장병들이 진짜 영웅"이라고 늘 말하곤 했다.

[간도특설대 독립군 토벌논란] 백선엽 활동 땐 동북항일연군 이미 자취 감춰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친일'로 규정하는 사람들은 그가 만주군 간도 특설대에 몸담고 항일 무장 세력, 더 나아가 우리 독립군을 '학살'까지 했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우선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한국인에게도 세대 차이는 있다. 백선엽은 1920년 11월 출생이다. 나라 빼앗긴 뒤 10년이 지나 세상에 나왔다. 따라서 나라를 빼앗긴 '부모 세대'에 비해 그는 식민지 치하 한국인 '신(新)세대'다.

그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주로 입학했다는 명문 평양사범학교를 1940년 2월에 졸업하고 당시 만주국 군대 장교들을 양성했던 봉천 군관학교 2년제를 마쳤다. 이어 1942년 초 헤이룽장(黑龍江) 자무쓰(佳木斯)의 만주군 신병학교 교관을 1년 정도 역임했다. 다시 그가 배치를 받은 곳이 '간도 특설대'다. 한국계 병사와 하사관, 초급 장교들로 이뤄진 부대였다. 만주군이 몽골과 이슬람 등 소수민족별로 만든 부대 중 하나로 규모는 대대급이었다. 부대는 1938년 창설과 함께 당시 만주의 '동북항일연군'을 상대로 작전을 벌였다.

그래서 '간도 특설대'는 "독립군 때려잡는 부대"라는 악명을 얻는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동북항일연군'은 중국 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부대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독립군'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만주에 주둔하던 일본 관동군(關東軍)의 강력한 토벌에 밀려 이들은 1940년 이후 소련 영토로 넘어간 경우가 많다. 따라서 백선엽이 간도 특설대에서 활동하던 1943년에는 이들이 벌써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본인 스스로도 "특설대에 있을 당시 특별한 작전 대상이 없어 부대 전체가 베이징 인근까지 진출했다. 대개는 공산당 계통의 홍군(紅軍)을 추적했고, 그나마 교전하는 경우도 드물어 정보 수집 등에 종사했다"고 회고한다. 그는 평양사범 뒤 왜 군문에 들어섰을까. 백선엽은 이렇게 설명했다. "한반도 강점 이후 세계 극강(極强)으로 향하던 일본의 힘이 어떤지를 제대로 알고자 했다." /유광종 소장

[서울현충원 안장 놓고 與野 대립] 100세 영웅 쉴곳은… 씁쓸한 현충원 안장 논란

6·25전쟁의 영웅 백선엽(100) 예비역 대장은 최근 들어 건강이 좋지 않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백 장군 측 관계자는 "사람들을 잘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며 "오늘(25일)이 6·25 70주년인지도 잘 인식하지 못하시는 것 같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백 장군의 사후(死後) 현충원 안장 문제를 두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여권 일각에서는 백 장군이 과거 친일 행적이 있다며 현충원 안장을 반대하고 있다.

반면 야권은 전쟁 영웅인 백 장군을 대전현충원이 아닌 서울현충원에 안장해야 한다고 맞서 있다. 백 장군 가족들은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대전현충원 안장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과거 정부는 백 장군을 서울현충원에 안장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하지만 현 정부 들어 기류가 바뀌었다. 정부는 백 장군 측에 "법대로 하겠다"는 방침을 통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현충원 장군 묘역이 꽉 찼으니 대전현충원에 백 장군을 안장하겠다는 얘기였다. 백 장군은 서울현충원 대신 대전현충원 안장이 유력해지자 작년 자신이 지휘해 싸웠던 경북 칠곡의 다부동을 찾아 묏자리를 봤다. 하지만 칠곡군의회의 반대 등으로 어려움이 예상되자 다부동 안장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 일각에서는 고(故) 채명신 장군처럼 백 장군을 서울현충원 사병 묘역에 안장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백 장군 측 관계자는 "백 장군은 화장(火葬)을 원치 않고 안장을 원하고 있다"고 했다. 사병 묘역은 3.3㎡(1평)이기 때문에 화장이 불가피하다. 군 관계자는 "현 상태에서는 대전현충원 안장 말고 방법이 없다"고 했다.

박삼득 국가보훈처장은 지난달 백 장군 현충원 안장 문제가 불거지자 국회에서 "백 장군은 대전현충원 안장 대상이 맞고 다른 의견은 고려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보훈처 소관이 아니지만 (국방부에) 확인해 보니 서울현충원 장군 묘역은 이미 꽉 찬 상황"이라고 했다. 국방부 역시 같은 입장을 되풀이해 밝혔다. /양승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