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그림, 남겨진 사랑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서울 명륜동 집에서 작업 중이던 마지막 그림 ‘가족’은 그림 속 가족이 집을 팔고 이사 나가는 순간까지 이젤 위에 그대로 놓여 주인을 기다렸다. 1950년에 북으로 간 임군홍 화백 이야기다. 월북한 가장이 남긴 그림은 함부로 노출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었다. ‘두 칸짜리 집에 산다면 방 한 칸은 온전히 부친의 작품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집을 옮겨 다닐 때도 늘 작품 보관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고 그림 속 젖먹이였던 아들은 말한다. 생이별 현장에 기억의 화석으로 남게 된 그 그림들이 지금 전시 중이다.
이쾌대 화백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바다. 사상적으로 좌익계 민족주의자였는데, 잠시 전향했다가 다시 조선미술동맹에서 활동했고, 전쟁 중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가 아내에게 편지를 쓴다. ‘아껴둔 나의 채색 등 하나씩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흰 캔버스, 그림들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주시오.’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달라…. 눈물 나는 이 전언의 당사자가 휴전 후 선택의 갈림길에서 가족을 뒤로한 채 북행을 택했다. 아내는 남편 물건을 처분하는 대신 자력으로 아이들을 키웠으며, 연좌제로 지속적인 감시와 추궁을 받으면서도 부엌 천장 다락에 꼭꼭 숨겨둔 그림들은 그녀 사후 10년 만에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분절의 역사를 지닌 나라에는 이런 이야기가 많다. 혁명·망명·숙청의 회오리가 한꺼번에 몰아친 20세기 러시아 문화사에도 무수하다. 현대 추상화가 바실리 칸딘스키(W. Kandinsky)와 독일 표현주의 화가 가브리엘레 뮌터(G. Münter)의 사랑도 유사한 경우에 속한다.
독일 알프스 지방 작은 마을 무르나우(Murnau)에 있는 뮌터 하우스(Münter-haus). 사제지간으로 만나 연인이 된 두 화가가 1909년부터 1914년까지 둥지를 튼 곳이다. 12살 연상의 칸딘스키는 유부남이었지만 이혼을 약속했고, 뮌터는 실질적인 ‘프라우(부인) 칸딘스키’로서 짧지 않은 세월을 헌신했다. 뮌터가 소유주였음에도 ‘러시안 하우스’로 불린 그곳에서 둘은 함께 정원을 가꾸고, 계단과 가구에 그림을 그려 넣고, 동일한 포즈로 서로의 사진을 찍고, 동일 대상을 비슷한 화풍으로 화폭에 담았다. 지금 가 봐도, 나비 날고 꿀벌 윙윙대는 낙원 동산이다.
하지만 그들의 연애사 자체는 별로 아름답지 못하다. 1차 대전 발발로 독일에서 쫓겨난 칸딘스키는 유럽을 떠돌다 혁명이 일어난 조국으로 돌아갔다. 이혼을 하긴 하지만, 정작 결혼은 뮌터보다 훨씬 젊고 아름다운 러시아 미녀와 했다. 이후 독일로 되돌아와 활동하면서도 오랫동안 자신을 기다려온 뮌터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이 진부한 드라마는 칸딘스키가 변호사를 통해 옛집에 남겨둔 그림의 반환을 요구하는 대목에 이르러 정점에 다다른다. 뮌터는 ‘도덕적 보상’을 주장하며 반환을 거부했고, 결국 작품들의 일부를 차지했다. 뮌터가 그림을 돌려주지 않고 무르나우 집 지하실 깊이 숨겨 보호한 덕에 칸딘스키 초기 작품 상당수가 나치의 문화 탄압 정책을 비켜 갈 수 있었다.
80세 되던 1957년, 뮌터는 자신의 비밀 컬렉션을 통째로 뮌헨시에 기증한다. 표현주의 회화의 보고가 된 렌바흐하우스(Lenbachhaus) 미술관 탄생이다. 칸딘스키와 결별 후 은둔했던 집 역시 함께 살던 당시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뮌터 하우스’라고 정식 명명된 그 집은, 말하자면 복권된 사랑의 기념관이다. (낡아빠진 표현이지만) 승리한 여성의 기념비다.
사랑이 변하듯, 무르나우 시기 말년에 가면 칸딘스키의 화풍도 변했다. 뮌터의 화풍은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 칸딘스키가 집 안 서랍장에 그려 넣은 장식 그림에서처럼, 뮌터의 말[馬]은 뒤돌아봄 없이 한 방향으로 달렸다. 무엇인가, 그 힘은? 오랜 인내와 믿음, 자신의 선택에 대한 존중과 자존심, 강인한 고집의 근력이다. 남겨진 그림과 남겨진 사랑을 그 힘이 살려냈다.
쓰다 보니, 홀로 남아 지켜낸 여자들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남자가 지켜준 여자 이야기도 분명 있을 터…. 그런데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여자 그림은 대부분 남자가 아니라, 여자 스스로 지켜냈던 것 같다. 그나마 끝까지 굳세게 살아남은 경우 그렇고, 가령 근대기 제1호 여류 화가 나혜석 같은 사람은 생전에 그림을 수백 점 그렸는데도, 대부분 유실되어 남은 작품이 별로 없다. 그녀의 사랑과 삶도 엉망으로 끝나버렸다. 참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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