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변월룡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래서 어린 월룡은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는데, 할아버지는 늘 어린 손자에게 “너는 꼭 고국으로 돌아가 살아라!” 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손자 이름을 러시아어로 짓지 않고 병진년 용띠해 달밤에 태어났다고 월룡(月龍)으로 지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이던 그는 훗날 실력 하나로 러시아 최고(最古)·최대(最大) 미술대학인 레핀미술대학에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했다. 참고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레핀미술대학은 1757년에 설립되어 26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그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박사 학위까지 받아 마침내 같은 대학교 교수까지 되었다.
변월룡은 대학 시절부터 렘브란트 작품을 좋아하여 틈만 나면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들러 작품을 연구했다고 한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롤모델로 삼은 셈이다. 하지만 렘브란트의 영향을 받지 않은 단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자화상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많이 남긴 화가로 유명하다. 이에 비해 그의 자화상은 1963년에 그린 ‘자화상’이 유일하다. 그것도 미완성에 그쳤다.
왠지 ‘자화상’을 보고 있으면 ‘슬픔’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특히 눈동자가 젖어있어 선명치가 않은데, 그 젖은 눈시울 때문에 슬픔이 극대화되어 보인다. 반면에 의연함도 잃지 않고 있는데, 꼿꼿한 자세는 절대 굴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 표현으로 읽힌다. 어쩌면 이러한 표현은 그동안 이민족 화가로서 받은 설움과 냉대 등이 함축돼 자신도 모르게 드러난 것은 아닐까 싶다.
사실 인종 차별과 민족 차별이 없진 않았다. 학교 당국은 변월룡에게 교수 재직 내내 1학년 데생만을 전담하게 했을 뿐 아니라 부교수에서 정교수 승진도 무려 24년을 보내 환갑을 넘긴 61세에 겨우 승진시켰다. 하여 그는 러시아 국적이면서 러시아인이 아니고 한민족이면서 한민족 취급을 못 받는 경계인의 삶을 사는 한, 스스로 자기 존재가 부질없다고 여겨 아예 자화상을 그릴 생각을 접었는지도 모르겠다.
1990년 5월 25일, 변월룡은 온전히 냉전 시대만을 겪다 생을 마감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북부 묘지에 안장되었다. 북부 묘지는 시내에서 북쪽으로 40여 분 걸리는 지역으로 한국의 벽제추모공원쯤으로 보면 된다. 참고로 대한제국 초대 공사 이범진도 바로 이곳에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