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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문화 . 시사

눈밭에 맨발로 사흘간 빌었다, 파문 거두라고… 황제의 굴욕과 복수.

by 주해 2022. 11. 29.

2020-07-28 16:11:09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14/2020071400004.html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19] 눈밭에 맨발로 사흘간 빌었다, 파문 거두라고… 황제의 굴욕과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19 눈밭에 맨발로 사흘간 빌었다, 파문 거두라고 황제의 굴욕과 복수 카노사의 굴욕

www.chosun.com

 

카노사의 굴욕

1077년 이탈리아 카노사 성문 밖에 독일 왕 하인리히 4세가 서 있는 '카노사 굴욕'을 묘사한 그림. 하인리히 4세가 말총으로 만든 참회복을 입고 눈 위에서 맨발로 서서 카노사성에 머물고 있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파문을 거둬달라며 용서를 빌고 있다. 영국 화가 아서 C 마이클 작품(1913년).

1077년 1월, 독일 왕이자 장차 황제가 될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 북부의 험준한 산악 지역인 카노사(Canossa)의 성에 찾아왔다. 이곳에는 그에게 파문 선고를 내린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머물고 있었다. 엄동설한 맹추위에 말총으로 만든 참회복을 입고 눈밭에 사흘 동안 맨발로 서서 용서를 빈 결과 교황은 파문을 거두어들였다. 이것이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사건이다.

국왕이 석고대죄하는 희대의 사건

국왕이 교황을 찾아가 석고대죄하는 희대의 사건은 어떤 맥락에서 벌어졌을까? 교과서적 설명에 따르면 이 사건의 원인은 서임권(敍任權) 투쟁에 있다. 서임권이란 주교나 수도원장 같은 교회 고위직을 임명할 권리를 뜻한다. 이 권리를 누가 행사하느냐, 교황이냐 아니면 황제나 국왕 같은 세속 지배자냐를 놓고 다툰 것이 서임권 투쟁이다. 곧 교회와 세속 권력 중 누가 더 우위에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카노사에서 벌어진 사건만 놓고 보면 국왕이 무릎을 꿇고 교황이 완승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사건의 전모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20여 년 거슬러 올라간 1056년, 황제 하인리히 3세가 죽었을 때 아들 하인리히 4세는 여섯 살에 불과했다. 독일 왕, 이탈리아 왕, 부르고뉴 왕 같은 왕위는 차지했지만, 황제위는 교황에게서 대관식을 승인받아야 가능했다. 그러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어린 국왕의 힘이 미약함을 이용해 독일 각지에서 귀족들이 분쟁과 봉기를 일으켰다. 특히 이전 황제에게서 영토를 많이 잠식당한 작센 지역 귀족들은 차제에 국왕의 간섭을 벗어던지고 그동안 빼앗긴 땅을 되찾고자 했다. 한때는 쾰른 대주교가 하인리히를 유괴하여 자기 통제하에 두기도 했다. 그렇지만 국왕은 점차 세력을 회복하여 귀족들의 봉기를 차례로 진압했다. 동시에 종교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자기 사람들을 주교와 수도원장으로 임명했다. 이 문제로 교황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교황은 세속인이 교회 인사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성직 매매(simony)죄에 해당한다면서, 그런 죄를 부추긴 하인리히의 부하들을 파문하며 압박했다. 교황에게 파문당하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내세에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을 뿐 아니라, 정치적 권위의 추락도 면하기 어렵다. 국왕이 교황의 견제를 당하는 것을 본 작센 귀족들이 공공연히 봉기에 나서자 하인리히는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교황은 국왕의 무도한 행위를 비난하는 서한을 보냈다. 파문당한 신하들과 계속 친분을 유지하면 왕이라도 미사에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동시에 교회 고위직 인사 문제에서 교황과 상의하지 않은 점을 맹렬히 비난했다. 결론은 세속 군주들은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황에게 파문당한 독일 왕 하인리히 4세

하인리히 4세와 서임권을 둘러싼 투쟁을 벌인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15~1085년)

하인리히는 협박에 굴복하지 않았다. 1076년 독일 지역 주교 26명을 보름스에 소집하여 '보름스의 회신'을 작성해서 보냈다. '찬탈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성스러운 기름 부음을 통해서 된 왕이, 교황이 아니라 거짓된 수도사인 힐데브란트(그레고리오의 속명)에게'라는 서한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서한은 이렇게 주장한다. '당신이 찬탈한 사도 자리에서 내려와서 포기하라. 다른 사람이 성 베드로의 보좌에 올라가도록 하라. 나 하인리히는 신의 은총에 의한 왕으로 우리의 모든 주교와 함께 당신에게 말하노니, 내려가라, 또 내려가라, 저주받은 자여.'

교황에게 '당신이나 사퇴하라'는 식의 모욕적 답신을 보낼 때는 의기양양했겠으나 그 직후부터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갔다. 교황은 서신에 서명한 주교들의 권한을 정지시켰고, 하인리히를 파문하면서 모든 기독교 신자가 그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독일 귀족들로서는 그들을 억압하던 국왕이 파문당하는 게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국왕에 대한 저항이 종교적으로 완전히 합리화되자 일부 귀족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하인리히의 모든 권한을 문제 삼는 일종의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고 교황에게 요청했다. 실제로 교황은 이 사태를 결말짓기 위해 독일로 향했다.

일이 이쯤 되니 하인리히가 다급해졌다. 불온한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가는 것을 본 하인리히는 교황이 독일로 들어오기 전에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교황이 카노사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하인리히는 카노사의 성주인 토스카나 여백작 마틸다에게 교황 면담을 요청했다. 국왕이 철저하게 참회하는 모습을 연출하니, 교황으로서는 난감하게 되었다. 파문을 거두어들이면 더 이상 국왕을 압박할 수단이 없어지고, 그렇다고 파문을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용서를 모르는 사악한 교황이 된다. 장고 끝에 교황은 국왕을 용서하기로 결정했다.

두 교황과 두 국왕 간 다툼

하인리히가 진심으로 참회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곧 분명해졌다. 교황이 파문을 거두어들이자마자 하인리히는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그레고리오가 교황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클레멘트 3세라는 이름으로 새 교황을 옹립했다. 그동안 독일 귀족들은 하인리히를 폐하고 루돌프(Rudolf von Rheinfelden)라는 인물을 새로운 독일 왕으로 선언했다. 이제 세상에는 두 교황과 두 독일 왕(다시 말해 예비 황제)이 다투는 최악의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상황은 막장으로 치달았다. 1080년 대립 국왕 루돌프가 사망하고 독일 내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고 판단한 하인리히는 군사를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갔다. 교황은 남부 이탈리아에 주둔 중이었던 노르만인들을 불러들였다(왜 여기서 노르망디 출신 용병들이 등장하는지는 다음에 설명하도록 하자). 양측이 여러 번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1084년 로마가 약탈당했고, 여기 맞서 로마 시민들이 봉기하자 교황은 노르만인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신했지만 얼마 후 생을 마쳤다. 그 전에 하인리히는 그가 추대한 교황 클레멘트 3세에게서 황제 관을 받았다.

장래 황제가 될 인물이 맨발로 눈밭에 서서 용서를 구할 때에는 교황이 이긴 듯하지만, 그가 군사를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가 교황을 축출했을 때는 황제가 최종 승리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교황과 황제 중 누가 더 우위를 차지하는가 하는 문제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최종적 결말이 나지 못했다. 장기간의 소모적 투쟁 끝에 양측이 타협을 모색한 것이 1122년의 보름스 협약이다. 이 협약에 따르면 추기경과 수도원장은 교회에 의해서만 자유롭게 선출된다고 천명했으니 이 점은 황제가 양보한 것이다. 한편 황제는 선거에 출석할 수 있으며 만일 다툼이 있으면 황제가 개입할 권리를 가진다고 했으니 이는 교황이 양보한 것이다. 하늘 아래 누가 최고 권한을 쥐는가 하는 문제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큰 문제로 남게 된다.

["교황청 지켜낸 女전사"]

카노사성 성주였던 토스카나의 여백작 마틸다(1046~1115년).

토스카나 여백작 마틸다는 하인리히 가문과 구원(舊怨)이 있었다. 황제 하인리히 3세가 그녀와 어머니를 인질로 잡아가서 감옥에 가두고 토스카나의 영토를 빼앗으려 했기 때문이다. 겨우 풀려나서 이탈리아로 돌아온 다음 철저한 교황주의자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카노사 사건 당시 독일로 여행하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안전을 보장해 준 것은 거의 전적으로 마틸다의 공적이다. 하인리히 지지 세력이 교황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마틸다는 군사를 동원하여 교황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카노사의 성으로 피신시켰다. 하인리히가 바깥에서 참회 퍼포먼스를 하는 동안 성안에서는 마틸다가 교황에게 이 사태를 해결할 조언을 했다. 위기에 맞서 ‘오직 베드로의 딸 마틸다만이 저항했노라(sola resistit ei Mathildis, filia Pétri)’. 이런 공적을 인정하여 교황청은 17세기에 마틸다의 시신을 베드로 성당 내부로 이장했다. 여성으로는 유일하다. 천재 조각가 베르니니가 마틸다의 조각상을 세우고 교황 우르바노 8세는 ‘교황청을 지켜낸 마틸다 여백작은 고대 아마존 전사에 필적한다’는 비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