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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문화 . 시사

황제에 쫓겨난 교황,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발견으로 극적인 역전승을 하다.

by 주해 2022. 11. 29.

2020-07-28 16:17:15

교회발 혁명이근대 국가를 혁신하다

주세페 몰테니 작 '고해성사'(1838년, 이탈리아 스칼라 광장 갤러리 소장). 고해성사 강화 규정은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확립되었다. 신자들은 매년 스스로 죄의 상태를 밝히고 교회 시민권을 갱신해야 했고, 이후 서구는 참회 문화가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누가 세계 최상위 권위를 가지는가? 황제인가, 교황인가? 황제 측 주장에 따르면 이 세상에 황제는 단 한 사람이고 다른 누구에 의해서도 심판될 수 없지만, 로마 주교는 여러 주교 중 한 명일 뿐이니 황제가 최상위 권한을 가진다. 반면 교황 측 주장에 따르면 황제는 여러 왕 중 최상위자일 뿐이며 황제 선출은 교황에게 확인받아야 하니, 교황이 황제보다 상위 권한을 가진다. ‘카노사의 굴욕’ 사건에서 보듯 성(聖)과 속(俗) 사이의 다툼은 표면적으로는 주교와 수도원장 같은 교회 고위직을 누가 임명하느냐 하는 ‘인사 갈등’ 문제였지만, 그 내면에는 이 세상의 기본 틀을 어떻게 짜느냐 하는 핵심 문제가 숨어 있다.

최상위 권위자는 황제인가, 교황인가

이 문제를 개선하려면 무엇보다 교회와 세속 사회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10세기경 클뤼니(Cluny) 수도원이 주도한 교회의 청정 개혁 운동이 그것이다. 이때 비로소 성직자들의 결혼, 축첩, 성행위 등 모든 남녀 결합이 엄격히 규제됐다. 이렇게 정화된 사람들이 행하는 성체성사만이 진실로 성스러우며, 이때 빵은 그리스도의 살로,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로 '본질이 변한다'(化體說·transubstantiation)고 정리했다. 새롭게 정립된 성스러운 공동체는 속인들의 개입을 완전히 배격하고 스스로 정한 제도와 규칙에 따라 살겠다는 '교회의 자유'를 주장했다.

이 움직임을 더 큰 단계로 확대하려 한 인물이 클뤼니 수도원 출신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서, 다름 아닌 '카노사의 굴욕' 사건 당시 교황이다. 그가 주장한 요체는 교황을 필두로 한 교회가 이 세상 질서를 새롭게 짜야 한다는 것이다. 교황의 생각은 '교황 교서(Dictatus Papae·1075)'에 정리되어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하느님에 의해 설립되었다'(제1조), '교황만이 주교를 폐위 혹은 복위시킬 수 있다'(제3조) 등 교황의 최상위권과 무오류성을 주장했다. 세속 권력과 충돌하게 된 문제 조항은 '교황은 황제를 폐위할 수 있다'는 제12조다. 이는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인' 자격으로 세속 문제와 교회 문제를 다루는 '검 두 자루'를 다 가진다는 주장이다. 이 문건을 들이밀자 당연히 황제 측이 극렬 반대하고 교황에게 무력 도발을 하여 최종적으로 그레고리오 7세는 로마에서 축출된 후 객사하고 말았다(19회 카노사의 굴욕 참조).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의 발견

여기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점은 아무리 교황이 최상위권을 주장한들 그것을 강제할 실제적 수단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무력을 가진 세속 권력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한 답이 '법의 힘'이다. 법은 권위의 원천이자 통제 수단이다. 교황 지지자들은 과거 기록을 뒤져서 교회뿐 아니라 세속에 관한 모든 일에 대해 교황이 최상위권을 차지한다는 근거를 찾았다. 중요한 계기는 11세기 말 피사 도서관에서 로마법대전(Corpus Iuris Civilis), 일명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50권이 발견된 일이다. 6세기 동로마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편찬된 후 600년 동안 아무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채 파묻혀 있던 서책이 세상에 나왔다. 덕분에 과거 로마제국이 개발했던 정치(精緻)한 개념과 법률 용어가 다시 알려졌다. 법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 교황의 약점을 보완하는 기반이 되었다. 교황은 법 해석자, 최고의 판관이며 최고 행정관이라고 주장했다. 교황 법정은 '모든 기독교국의 재판정'이며, 교황은 '만인의 통상적 재판관'임을 선언하였다. 말하자면 교황이 기독교 세계 전체를 지도한다는 주장이다. 순전히 이론상 주장 아닌가? 물론이다. 그렇지만 이론을 갖추고 지속적으로 설득해 가면 결국 이론이 힘을 가지게 된다.

'카노사의 굴욕' 사건 당시 표면적으로는 교황 그레고리오가 졌으나 길게 보면 교황의 이상이 달성된 셈이다. 성직자 독신제가 성립되고 성직 매매(세속 당국의 성직자 임명)는 사라졌다. 교회는 세속 당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직으로 거듭났다. 새로운 교회법을 중심으로 '유럽 전체를 통일하는 기독교 공동체', 즉 '보편 교회(the Church)'가 성립되었다. 교회법은 교회 내부 사항만 규정하는 내규가 아니라 세례, 교육, 혼인, 성범죄, 더 나아가서 신탁이나 계약 문제 등 민법 사항까지 포괄한다. 역설적으로 교회가 세속 권력에서 떨어져 나온 후 오히려 세상만사를 통제하는 독립적 '교회 국가(Kirchenstaat)'로 격상한 것이다. 이 모든 일의 기반에는 교황이 세상의 최고 권위(sovereignty)를 차지한다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말은 후일 '주권'으로 번역되어 다른 의미로 차용되지만, 원래는 '교황 권력의 완전성(plenitudo potestatis)'을 의미했다. 

교황 혁명은 근대 세계의 출발점

그동안 세속 국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놀라운 반전이 준비되었다. 교회의 근본적 변화가 다시 세속 국가의 발전을 가져왔다. 쉽게 말해 교회 공동체의 발전을 모범으로 삼고 따라 한 것이다. 그들도 로마법 연구를 통해 국가의 기본법을 다듬더니, 각국 내부에서는 국왕이 로마 황제와 다름없는 지상권(至上權)을 가진다는 개념을 만들었다. 종교 문제에서는 교회에 복종한다 하더라도, 같은 논리를 들며 세속 문제에서는 국왕이 하느님의 권위를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경계가 흐릿한 채 뒤섞여 있던 교회와 국가라는 두 조직이 각자 명료하게 자신의 체제를 확립해 갔다.

이탈리아 살레르노 대성당의 교황 그레고리오 7세 무덤. 유리관 안에는 밀랍 조상이 있다. 교황은 독일 하인리히 4세가 무력 도발을 하여 로마에서 축출된 후 살레르노에서 객사했다.

이런 발전을 '힐데브란트(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이라 부른다. 이때 '개혁(Reformatio)'은 점진적 변화나 부분적 수정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혁명'에 가깝다. 그것은 '세계 전체에 형태를 다시 부여하는 것(Reformatio totius orbis)', 요컨대 세계 혁명의 의미다. 교회에서 시작한 혁신 운동인 '교황 혁명'이 길게 보면 근대 세계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고해성사의 완성] 교회 혁신은 위에서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참여와 동의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모든 사람의 신앙을 내면부터 강화해야 한다. 최선의 방법은 죄의 인식과 참회의 내면화이다. 신자들에게 심층적 죄책감을 불러일으켜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교회가 가르치는 길로 나아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구체적 방법은 고해성사 강화다. 매년 의무적으로 고해성사를 하도록 한 규정은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확립되었다. 이 공의회에서 모든 신자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종교 의무 사항과 교회 행정 절차를 확립했기 때문에, 중세 기독교 교회가 사실상 이때 재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중 고해성사를 규정한 것은 21조다.

"사리 분별 연령(10대 초반)에 도달한 모든 남녀 신자는 적어도 1년에 한 번 자기 교구의 사제에게 진심으로 고해를 하고 그들에게 부과된 고행을 능력껏 최선을 다해 수행해야 하며, 적어도 부활절에는 성체성사를 정중하게 받아야 한다.… 그러지 않은 자는 평생 교회 출입을 금지당하며 기독교적 매장을 거부당할 것이다."

이 규정은 ‘교회 국가’의 시민권 관련 규정에 해당한다. 교회는 세례 증명서와 사망 증명서를 발급하는 방식으로 시민을 등록시켰고, 반대로 파문은 시민권을 박탈하는 방식이었다. 신자들은 매년 스스로 자기 영혼의 내면을 들여다본 후 죄의 상태를 밝히고 성체성사를 받아 교회 시민권을 갱신해야 한다. 이후 서구는 죄의 문명, 참회 문화가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년 재위). '카노사의 굴욕'과 교회 혁신 운동인 '힐데브란트의 개혁'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