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9 09:46:04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2/29/2018122900079.html
[현미경] 미국에 배신당하고… 쿠르드, 러시아에 SOS
적대관계 시리아 정부군에까지 "터키 공격 막아달라" 구원 요청
강대국에 번번이 뒤통수… '세계최대 국가없는 민족' 비운의 역사
쿠르드(kurd)족에게 배신의 역사가 또 한 번 반복됐다. 동맹이었던 미국에 배신당한 이들은 결국 적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나섰다.
로이터통신은 27일(현지 시각) 시리아 북부 지역을 이끄는 쿠르드족 지도자가 러시아와 시리아 정부군에 터키를 막아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쿠르드족은 시리아에서 미국·영국 등이 포함된 연합군과 함께 이슬람국가(Islamic State of Iraq and Syria·IS) 격퇴를 위해 함께 싸웠다. IS 격퇴전과 별도로 시리아에선 2011년부터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과 시리아 반정부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은 반정부군을 지원했다. 쿠르드 민병대도 미군의 지원을 받고 있어, 시리아 정부군 및 이를 지원하는 러시아와는 적대 관계라 할 수 있다.
미군이 주도한 연합군의 IS 격퇴전에서 미국의 지상군 역할을 한 게 쿠르드족 민병대다. 지상전에서 사실상 총알받이 역할을 한 것이다. 그 때문에 쿠르드 민병대는 4년간 수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쿠르드족이 이런 희생을 감수한 것은 IS 소탕전에서 승리하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시리아 내에서 분리해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9일 쿠르드족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없이 일방적으로 미군 철수를 선언해 버린 것이다.
쿠르드족은 미군이라는 방어막이 없어지면서 터키군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될 위험에 처했다. 터키는 그동안 쿠르드 민병대를 터키에 대한 테러 집단으로 규정해왔다. 이웃 국가인 시리아에서 쿠르드족이 독립하면 터키 내 1500만명에 달하는 쿠르드족에게도 영향을 끼쳐 분리 독립 움직임이 일어날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동안 미국 때문에 쿠르드족에 대한 무력 행사를 꺼렸던 터키는 미군 철수 발표가 나오자 즉시 "시리아 내 쿠르드족 민병대를 소탕하겠다"고 공언하고 나섰다. 미국 시사 주간지 애틀랜틱은 22일 "그동안 무수히 반복돼 오던, 독립을 담보로 한 쿠르드족에 대한 배신의 역사가 또 한 번 되풀이됐다"고 했다.
쿠르드족은 인구가 약 3000만명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국가 없는 민족'이다. 이들은 터키(1500만명)·시리아(200만명)·이라크(500만명)·이란(800만명)에 퍼져 있다. 신생 국가인 1932년 건국된 이라크에서만 유일하게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쿠르드족의 독립을 담보로 한 배신의 역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쿠르드족이 독립을 꿈꾼 순간부터 배신이 시작됐다. 오스만제국에 속해 있던 쿠르드족은 오스만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주의를 제창하면서 독립 희망을 갖게 됐다. 실제 쿠르드족은 1920년 연합국과 터키 정부가 체결한 세브르 조약을 통해 터키 동부에서 독립적 자치권을 갖기로 했다.
그러나 터키 젊은 군인들이 들고일어나면서 연합국과 터키는 1923년 패전 조약을 무효화하고, 쿠르드족의 독립을 무산시킨 로잔 조약을 새로 체결했다. 여기엔 영국의 속내도 작용했다. 쿠르드족에게 주기로 한 땅에 대규모 유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자, 당시 석유 확보에 온 힘을 기울였던 영국 윈스턴 처칠 장관이 그 지역을 아예 영국령 이라크로 편입시켜 영국 영향력하에 뒀던 것이다.
1946년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이란을 점령했던 소련의 도움으로 이란 북부 지역에 쿠르드 공화국을 세웠으나, 1년도 안 돼 이란에 궤멸당했다. 공화국을 세우게 한 것은 이란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소련의 속셈이었던 것이다. 소련은 이란이 쿠르드 공화국을 공격해 오자, 쿠르드 공화국의 요청에도 군사 지원을 하지 않았다.
1972년에는 미국과 이란의 도움으로 이라크 내 쿠르드 자치정부 수립을 위해 이라크군과 3년 동안 싸웠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이란 팔레비 왕조와 손잡은 미국이 이란과 국경 분쟁을 벌이는 이라크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쿠르드족에 무기와 자금을 댔다. 그러나 이란과 이라크가 협상을 통해 국경 분쟁에 합의하면서, 쿠르드 독립의 꿈은 또 한 번 날아갔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이후 1988년 쿠르드족이 과거처럼 이란 편에 설 것을 우려해 이들을 화학무기로 대량 학살하고 마을을 폐허로 만들기도 했다.
같은 역사가 1991년에도 반복됐다.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사막의 폭풍 작전을 통해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군을 격퇴한 후, 사담 후세인 축출을 겨냥해 이라크 내부의 봉기를 촉구한 것이다. 이에 호응해 이라크 내 쿠르드족이 독립운동을 벌였으나, 미국은 끝내 이들에 대한 군사 지원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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