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서 매일 들리던 망치 소리, 無言의 교육이었다
①1973년작 드로잉 ‘산동네 풍경’. 작가가 살던 산동네 풍경으로 화면 구성이 흥미롭다. ②1979년작 돌조각 ‘79-15′. ③나무·풀잎 등을 화면에 옮긴 1956년작 드로잉. ④대갓집 며느리로 평생 일만 했던 어머니의 얼굴을 돌에 새긴 1974년작 ‘어머니상’. /김종영미술관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아동문학가 이원수가 가사를 쓴 ‘고향의 봄’이다. 이 노래에 등장하는 ‘꽃대궐’은 이원수가 유년 시절을 보낸 경남 창원 소답리에 있었다. 높은 누각을 올린 운치 있는 한옥, 꽃으로 가득한 정감 있는 집들 사이에서 이원수는 어린 시절 서당에 다녔다. 그런데 이때 이원수가 본 ‘꽃대궐’은 바로 조각가 김종영(1915~1982)의 집이었다. 김종영이 누구인가? 그는 창원 소답리에서 태어나 근대 추상조각의 선구자로 칭송받는 한국 조각계의 대부 같은 존재였다. 다만 그 이름이 대중에게는 낯설기에, 여기 소개하고자 한다.
◇꽃대궐에서 자란 김종영
경상남도 창원 소답동에 있는 김종영 생가. /김종영미술관
동요에 나오는 ‘꽃대궐’을 짓고 가꾼 이는 김종영의 증조부 김영규였다. 그는 대한제국 말 장례원 전사, 지금으로 치면 차관급 직위까지 올랐던 이였으나, 나라가 망하자 모든 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왔다. 비서원 승지를 하던 아들(김종영의 조부)도 데리고서. 그러니 이 학식 높은 양반들이 창원에서 마을을 돌보고 후학을 기르는 일에만 전념하며 세월을 보냈다. 나라 잃은 설움을 나눌 우국지사들이 그 집에 드나든 것은 당연했다. 일본 천황이 주는 작위를 거절하고 은거했던 석촌 윤용구, 왕가 자손 중 유일하게 독립운동 이력을 가진 의친왕 이강이 그의 집 당호(堂號)를 써준 것도 이런 배경일 것이다.
김종영은 할아버지에게 업혀 지냈다고 할 만큼 사랑을 독차지한 집안의 장손이었다. 그의 아버지 김기호는 아예 출사(出仕·벼슬을 해 관아에 나감)한 적이 없다. 출사할 나이에 일제강점기가 되었으니, 도리가 없었다. 그는 평생 처사로 지내며 학문을 갈고닦았다. 동양의 전통사상을 깊이 연구했고, 아들 김종영을 직접 교육시켰다. 김종영은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 방에서 함께 생활하며 한학과 서예를 배웠다. 초등학교는 아예 가지 않았다. 그는 어린 시절 증조부, 조부, 부친의 사랑과 가르침을 자연스레 체득했다.
◇서예와 조각 사이
김종영의 예술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글씨 ‘근도핵예(根道核藝)’. 도는 뿌리, 예는 열매라는 뜻이다. /김종영미술관
1930년 15살이 되자, 김종영은 상경해 휘문고보에 입학했다. 그리고 재학 중이던 1932년 전조선남녀학생전람회 서예 부문에서 1등을 차지했다. 다섯 살 때부터 익힌 그의 서예 실력을 따라올 자가 없었던 모양이다. 안진경의 ‘원정비’를 따라 쓴 김종영의 정갈한 글씨는 신문에도 실렸다. 중국 당나라 현종이 출사를 종용해도 끝내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던 이현정의 삶을 기록한 글이었다. 내용이 어쩐지 김종영의 부친과 선조들 이야기 같다. 세속의 이해타산을 떠나, 소탈한 삶을 자처했던 도인(道人)의 이야기다.
휘문고보에는 장발(1901~2001)이 미술 교사로 있었다. 장발은 이미 1920년대에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미술실기와 미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1세대 서양화가였다. 이탈리아에 직접 가서 종교화를 연구한 그는 한국에서 서양 문물을 가장 빨리 체감한 인물이었다. 장발은 천주교인으로 종교미술에 심취했던 터라, 한국에도 화가뿐 아니라 조각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을 통감했다. 외국 성당에 나가 보면, 건물 전체가 조각으로 가득 차 있지 않나. 그래서 장발은 휘문고보 학생 중 유난히 뛰어났던 김종영에게 조각을 배워오라고 독려했다. 1936년 김종영은 일본 도쿄미술학교 조소과에 입학해서, 미술해부학을 비롯한 인체조각의 과학적 기초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그러니까 김종영은 뿌리 깊은 동양철학의 형이상학을 연구한 그의 아버지 김기호와 당대 가장 최신 서양미술을 받아들인 장발이라는 두 스승 밑에서 성장했다. 그에게서 동양과 서양, 전통과 미래가 교차할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운명이었다.
◇추상의 이해
1964년작 ‘자각상’. 김종영이 49세에 제작한 자각상으로, 눈을 감은 채 내면에 깊이 몰입한 자신의 모습을 나무에 담았다. /김종영미술관
이러한 환경에서 김종영이 보고 느꼈을 문제의식을 상상해 보라. 그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 밑에서 우리 전통 사상의 높은 가치를 누구보다 잘 체득한 인물이다. 그 가치는 우리 눈에 쉽게 보이지는 않지만, 무한히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가깝게 말하면 사랑이나 의리와 같은 무형의 가치이고, 거창하게 말하면 우주와 자연의 질서,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 같은 것이다. 흔히 도교사상에서는 ‘도(道)’라고도 얘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높은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지녔음에도 조선은 서양의 과학적, 이성적 사고가 부족해 나라가 망하는 뼈아픈 경험을 했다. 그러니 김종영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무한한 가치를 추구하는 동양의 사상에 뿌리를 두되, 서양의 과학적 사고를 종합해,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인 언어를 찾을 길은 없을까? 1955년 마흔이 된 김종영은 이런 메모를 남겼다.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나 통할 수 있는 보편성과 어느 시대이고 생명을 잃지 않는 영원성을 가진 작품을 만들고 싶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보자. “그후 오랜 세월의 모색과 방황 끝에, 추상 예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 내가 갖고 있던 여러 가지 숙제가 다소 풀리는 듯하였다. 사물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참으로 실현하기 어려운, 지역적인 특수성과 세계적인 보편성의 조화 같은 문제도 어떤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는 ‘추상’을 연구하면서 실마리를 찾았다고 했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우리도 그 실마리를 따라가 보자. ‘작품 77-6′은 과연 무엇인가? 이것은 사람의 얼굴이나 몸을 단순화시킨 것 같기도 하고, 흔한 꽃잎 같이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이것은 특정한 하나의 사물이라기보다, 인간이나 자연이 생장하는 원리 자체를 형상화한 것으로도 보인다. 하나의 중심원에서 생겨난 여러 작은 원들의 힘과 에너지 자체가 주제일 수도 있겠다. 그러고 보면, 이 작은 원들은 비슷하지만 각기 조금씩 다르게 자란다. 꽃잎의 모양이 모두 똑같지 않고, 한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이 다 같을 수 없듯이. 그러고 보면 자연의 모든 생장은 어떤 저항력을 기반으로 한다.
우리는 그의 작품 하나를 두고, 이와 같은 상상을 끝도 없이 해볼 수 있다. 예술가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돌덩어리에 약간의 ‘가공(加工)’을 했을 뿐이지만, 관람자는 각자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풍부한 해석을 덧붙일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작가가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 한 작품에 무한한 내용을 ‘함축’했기 때문인데, 그것이 말하자면 ‘추상’의 원리이다.
김종영이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했던 것은, 서양에서 말하는 추상 개념을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동양에서 체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서예만 해도 그렇다. 추사 김정희의 서예가 지닌 구조의 미학은 폴 세잔의 자연에 대한 구축적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김종영의 생각이었다. 그는 철저한 동양철학의 바탕 위에서 현대 추상의 문제를 해석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그는 동서양 어디에서나 통용될 만한 좀 더 보편적인 궁극의 형상을 찾고 있었다.
◇평범했지만 모두가 존경한 삶
생전의 조각가 김종영. /김종영미술관
평생 이렇게 심오한 생각에 사로잡힌 채 김종영은 어떻게 살았을까? 의외로 그의 생활은 지극히 단순했다. 그는 해방 후 1948년부터 1980년까지 평생 서울대 조소과 교수로 지냈다. 오로지 학교와 집을 왕래한 것이 그의 생활 반경의 전부였다. 집에는 제대로 된 아틀리에도 없었기에 그는 주로 마당에서 작업했다. 동네 사람에게 망치 소리가 들리지 않아야 해서, 그의 집은 삼선교 부근 언덕 꼭대기 인적이 드문 달동네에 있었다. 그의 아내는 “사또 할아버지에게 업어 키워진 귀한 손자”가 달동네에 사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김종영을 마음 깊이 존경했다.
학교에서도 그는 매우 평범한 생활을 했다. 학생들에게 미술해부학을 가르쳤고 조소 지도를 했지만, 대체로 말수가 적었고, 말을 해도 어눌한 편이었다. 한마디씩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비유나 격언을 던지듯이 했을 뿐이다. 작품 발표도 거의 한 적이 없었기에, 김종영이 평소 무엇을 만드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다만, 미대 건물 복도 끝 김종영의 방에서는 매일 일정한 속도로 망치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학생들은 그 망치 소리가 진정한 ‘무언(無言)의 교육’임을 알아들었다. 이상하게도 서울대 미대생이라면 모두 김종영을 존경했다.
1982년 67세를 일기로 김종영이 타계하고서야 그가 평생 무엇을 만들었는지 전모가 밝혀졌다. 그는 총 220여 점의 조각과 2000여 점의 서예, 그리고 3000여 점의 드로잉을 남겼다. 그가 이렇게 많은 서예와 드로잉 작업도 했는지는 가까운 이들조차 잘 몰랐다.
◇김종영의 유산
김종영 '삼일독립선언기념탑'. 원작은 1963년에 제작됐으나, 훼손돼 버려졌다가 제자들이 복원해 서대문 공원에 다시 세웠다. /김종영미술관
김종영은 사실 공공조각을 두 번 제작한 적이 있었다. 1963년 국민 성금으로 만든 ‘삼일독립선언기념탑’이 그중 하나다. 그러나 파고다 공원에 세워졌던 그의 대형 조각은 1979년 군사정권 때 석연치 않은 이유로 아무도 모르는 사이 삼청공원에 버려졌다. 민주화 물결이 거세질 때라, 사람들을 선동하는 듯한 기념상의 자세가 문제가 됐다는 설이 있다. 이 상은 김종영이 죽을 때까지 버려진 채 남았다가, 그의 제자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1991년에야 서대문 독립공원에 다시 세워졌다. 그의 아름다운 생가도 수난을 겪었다. 1994년 본채와 별채인 사미루(四美樓) 사이에 길이 나서 한옥 일부가 훼철됐고, 일대 한옥마을은 두 동강이 났다. 무도(無道)한 일이다.
김종영을 가까이에서 본 이들만은 그가 추구한 ‘무한의 가치’를 따르기 위해 노력했다. 제자들 중 최종태·최의순·송영수·김세중·최만린·엄태정 등이 나와 새로운 한국 조각의 시대를 열었다. 모두 엄청난 내공의 조각가들이다. 김종영의 작품은 살아있는 동안 딱 두 번 밖으로 나갔는데, 삼성 이건희 회장과 원화랑 정기용 대표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김종영의 귀한 뜻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그의 사후 작품들을 다시 국·공립미술관에 기증했다. 현재 그 작품들 중 3점이 서울 소마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에 나와 있다. 김종영이 남긴 다른 모든 작품은, 유족에 의해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 보존되고 있다. 다행(多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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