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초반 어머니는 파리로 떠났다. “프랑스에 가서 성공해 자랑스러운 어머니가 되어 돌아오겠다”며 우리 곁을 떠난 어머니가 어린 나이에 섭섭하게만 느껴졌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어린 두 동생과 함께 어머니 없이 지내던 나날은 허황하기만 했다. 1957년 중학교 3학년이 됐을 때, 어머님 편지를 처음 받았다. “파리에서 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는 편지를 아우들과 함께 밤새워 읽었다. 어머니 이성자(1918~2009) 화가가 파리의 유명한 전시회에 ‘눈 덮인 거리’를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고 라라뱅시 화랑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게 됐다는 희소식을 듣게 된 건 고등학교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1965년 우리 삼형제가 모두 대학생이 됐을 때 어머님이 일시 귀국했다. 파리의 유명한 샤르팡티에 화랑에서 성황리에 개인전이 끝난 후 금의환향이었다. 세 아들을 14년 만에 다시 만나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공항에서 아우 용학(파리 건축대 교수)과 용극(유로통상 회장), 그리고 외삼촌 이상국(서울대 의대 교수)과 이한필(가수 위키리)이 어머니와 감격적인 재회를 했다. 프랑스에서 화가가 되어 귀국한 어머님은 유화 45점과 목판화 40여 점을 가지고 오셨다. 당신은 전시회를 소망했으나, 당시 서울에는 100호짜리 대형 유화들을 포함해 80여 점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화랑이 없었다. 서울대 졸업반으로 대학신문 편집장을 맡고 있던 나는 대학본부에 간청해 의과대학 캠퍼스에 있던 교수회관을 대관, 어머님의 귀국 전시회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전시회 준비에 음양으로 도움을 주셨던 김병기, 김세중, 이경성, 이대원, 최순우, 천승복 선생님들은 어머니 작품을 보면서 “고구려 벽화가 연상된다” “승화된 한국의 색동무늬 같다”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우들과 삼촌들이 함께 모여서 작명 경쟁도 벌였다. 눈부신 색채와 아름다운 비단무늬가 연상되는 작품들을 보면서 ‘내가 아는 어머니’ ‘연꽃 핀 궁전’ ‘어제와 내일’ ‘새벽 무지개’ ‘오작교’ 같은 시적인 제목을 붙였다. 어머니도 “멋진 제목”이라며 좋아하셨다. 서울고등학교 시절 가깝게 모시던 조병화 선생님께 ‘오작교’ 작품에 헌시를 부탁드려 대학신문에 게재한 일도 있었다.
어머니가 파리로 떠나신 지 72년 만에 소마미술관에 ‘어제와 내일’이 전시됐다. 섬세한 붓질로 캔버스의 모든 면을 채운 작품이다. 어머니는 작가 노트에 “붓질 하나하나가 자식들의 안위에 대한 염원, 자신을 다잡는 주문”이라고 썼다고 한다. 우리 삼형제가 그리울 때마다 밭을 갈아 씨앗을 뿌리고 땅을 일구듯 캔버스를 채워나갔을 거다. 이제는 하늘로 떠난 어머니 작품 앞에 서서 보니, “자랑스러운 어머니가 되겠다”며 프랑스로 떠났던 어머니 말씀이 새삼 진심으로 다가온다. /신용석 인천시립박물관 운영위원장 이성자 화가의 장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