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는 정신 연령이 다섯 살 넘으면 그림 못 그려”
경기도 남양주에 ‘궁집’이 있다. 영조 임금이 사랑하는 막내딸을 위해 궁에서 일하는 대목장을 보내 지은 집이라 한다. 쓰러진 조선 왕조의 영화(榮華)를 상징하는 이 집이 1970년대 초 매물로 나왔을 때, 궁집이 자칫 요정으로 쓰이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화가 권옥연(1923~2011)과 무대미술가 이병복(1927~2017) 부부였다. 이들은 궁집을 사서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대 땅을 더 구매하고 좋은 한옥이 있으면 전국에서 통째로 옮겨 왔다. 마침 권옥연의 작품이 1980년대 이후 잘 팔려 “그림 한 장, 기와 한 장” 하는 심정으로 그림을 파는 족족 궁집 일대를 가꿨다. 총 여덟 채의 집이 들어섰다.
관리는 쉽지 않았다. 담이 무너지고 비가 새고, 사람이 살지 않은 한옥에는 세 번 도둑이 들었다. 개인이 돌보기에 땅은 너무 넓었다. 정원에는 풀이 무성해졌다. 부부는 시도 때도 없이 돈 들어가고 마음 쓰이는 일종의 ‘고건축박물관’을 장장 40년간 일구다 세상을 떠났다. ‘왜 이런 바보 같은 짓을 시작했을까?’ 후회하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궁집의 옛 주인, 권옥연 이야기를 해보자.
◇고향, 함흥
1970년 완성한 화가의 자화상. /개인 소장
권옥연은 함흥 사람이다. 정3품 벼슬을 지낸 고조부를 둔 권옥연의 집안은 함흥에서 양반집으로 통했다. 증조부는 추사 김정희와 교분이 있었고, 조부는 최린(함흥 출신의 민족대표 33인)과 동문수학했다. 권옥연의 유년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하다. 할아버지는 하인에게 종이를 다듬이질시켜 깨끗하고 정성스레 만든 장지 위에다 다섯 살짜리 손자에게 한자를 가르쳤다. 같은 시대 할아버지의 친구 최린은 일찌감치 일본 유학을 다녀와 단발하고 양장을 입었지만, 그의 할아버지는 평생 상투를 틀었던 보수적 인물이었다.
권옥연의 아버지는 이런 보수적인 집안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자주 들려주었다. 계정식과 홍난파의 친구였고, 나운규와도 어울린 자유로운 영혼이었지만, 일본 교토에서 맹장염이 생겨 27세에 세상을 떠났다. 권옥연을 집안의 유일한 아들로 남겨두고. 권옥연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비극적’이라고 표현했다. 4대가 함께 사는 엄격한 유교 집안에는 장례식장 같은 엄숙한 분위기가 흘렀다. 잦은 제사에서 장손이자 독자인 자신이 수행해야 할 역할은 늘 무겁고 숨 막히는 것이었다. 동네 아이들은 감히 접근할 수 없던 대갓집 텅 빈 마당에서 그는 외로움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고 했다.
◇화가가 된 이유
1951년작 ‘부인 초상’. 권옥연의 인물화는 대체로 모델이 없지만, 이 작품은 부인 이병복을 그린 것이다. 1951년 결혼식을 올린 해에 그린 작품이다. /개인 소장
화가가 된 것도 운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비극적인 운명이었다고. 음악을 했더라면 더 행복했을지 모른다고도 했다. 옛날 부잣집 자손들이 대부분 그랬듯 권옥연도 경성에서 중등 교육을 받았다. 명문인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에 입학한 그는 우연히 조선미술전람회를 관람하고 ‘나도 저렇게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혼자 그림을 그려 학생 전람회에 출품해 상을 받았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학교 선생님을 찾아가 손자가 그림을 계속 그리면 학교에 불을 질러 버리겠다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권옥연은 할아버지에게 지지 않으려고, 인정받으려고 더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것이 결국 권옥연을 화가로 만들었다. 권옥연은 고등학생 신분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해 신문에 났다. 길진섭의 호평도 잡지에 실렸다. 졸업 후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정식으로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는 ‘할아버지’라는 거대한 존재를 평생 인식했다. 지극한 정성과 사랑으로 자신을 키운 존재. 동시에 엄청난 중압감을 제공함으로써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킨 존재. 이 양가 감정 사이에서 긴장하고 버텨내는 일이 그에게 주어진 숙명이었다.
◇잃어버린 고향, 떠도는 삶
1957년 작 '몽마르트르 거리 풍경'. 권옥연이 파리에 도착한 후 거의 처음으로 그린 풍경화다. /개인 소장
대갓집 장손의 위치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건 뜻밖의 사건 때문이었다. 전쟁이 터진 것이다. 권옥연은 홀어머니와 함께 무일푼으로 함흥을 빠져나와 월남했다. 이중섭이 원산에서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빈손으로 남하한 것과 비슷하게 급박한 상황이었다. 권옥연의 어머니는 이 와중에도 오로지 맏며느리의 책무로 ‘복단지’만은 들고 내려왔다고 한다.
피란지 부산에서 권옥연은 이병복을 만나 1951년 전쟁 중 결혼식을 올렸다. 영천 이씨 집안의 장녀 이병복 또한 엄청난 대갓집 출신이다. 영천에서 경주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 갈 수 있었다고 할 정도로. 그의 아버지 형제들, 활(活)과 홍(泓), 담(潭), 호(澔)는 그 시절 런던 유학에 도쿄제대, 교토제대 출신들이다. 그러나 해방 후 지주 집안의 재산은 파탄 났고, 전쟁 중 이병복의 부친은 납북됐다.
두 양반 명문가의 만남이었지만, 전쟁 통에 양반이 어디 있겠는가. 이병복은 결혼 후 딱 3일간 시어머니께 아침 문안 절을 드렸다. 피란지 부산에 방이 너무 작아 절을 할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때 시인 정지용의 애제자로 이화여전 영문과 출신인 이병복은 부산 PX에서 근무하며 물건을 떼다 팔아 돈을 모았다. 그러면서 권옥연을 ‘한국의 피카소’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부부는 1956년 파리로 갔다. 권옥연은 아카데미 드 라 그랑 쇼미에르에 적을 두고, 독특한 초현실주의 스타일의 작품을 그렸다. 이병복은 아카데미 드 쿠프 드 파리에서 의상디자인을 공부해서, 훗날 한국 무대의상과 무대디자인의 선구자가 될 준비를 했다. 3년간 체류한 파리를 떠나기 직전, 권옥연은 전설적인 비평가 앙드레 브르통을 만났다.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을 한 바로 그 앙드레 브르통. “그렇지, 초현실주의는 이렇게 동양 사람에서 나와야지”라고 말하며, 전시하면 서문을 써 주겠다는 그를 두고 부부는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어머니 환갑 전에는 귀국하기로 약조했기 때문이다.
◇노스탤지어와 고독
'무제'(1977~78). 적막한 무채색 언덕에 허물어질 듯 놓여 있는 집 한 채, 그 위로 흐물거리는 달무리…. 저세상과 같은 처연한 그런 세계를 권옥연은 그렸다. /개인 소장
권옥연의 작품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세상에 존재할 법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무엇에 대한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그 무엇을 찾아 헤맸다. 비극적이고 우울한, 몰락해가는 왕조의 문화가 싫어서 그는 서양 문화에 기대 보았다. 그러나 처음 파리 공항으로 비행기가 착륙하려 할 때, 상공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 풍경을 보며 그가 처음 든 생각은 이랬다. ‘아, 한국의 절, 울타리, 초가집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올 걸.’
그는 강력한 조선의 전통을 그저 글로 배운 게 아니라 몸으로 체득한 인물이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며 동시에 그것에게로 귀의하기를 바랐다. 하나의 강력한 자력으로부터 멀어지고 끌어당겨지기를 반복하면서, 그는 자기만의 정박지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는 실패했다. 스스로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서도 정박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단지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1968년 작 '좌상'. 권옥연이 즐겨 그렸던, 어디에도 없지만 분명 어디에선가 마주칠 것 같은 여인이 앉아 있다. /개인 소장
장례식장 같은 휘장이 드리워지고, 처연하게 달무리가 흐물거리는 풍경. 저 높이 언덕 위에 서 있는 집 위로, 하늘을 향해 꽂혀 있는 깃발. 소리도 바람도 심지어 색채도 없는 적막한 세계. 닿을 듯 말 듯한데, 결국 닿지 못 하는 그런 세계를 권옥연은 그렸다. 그것은 ‘저세상’의 풍경이다. 온통 무채색이다. 회청색이다. 특기인 인물을 그릴 때도 그랬다. 권옥연은 어떤 대상을 모델로 해서 그린 적이 거의 없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인이 그 작품의 주된 소재다. 그는 뭘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 때 버릇처럼 이런 여인 얼굴을 그렸다. 국적도 신분도 나이도 가늠하기 어려운 한 여인의 모습을.
사람들은 흔히 권옥연을 쾌활하고 유쾌한 인물로 기억한다. 누군가를 만나면 반갑게 볼을 비비는 프랑스식 인사를 하고, 붙임성 좋고 애교 많은 사람. 잘생겼고 무엇보다 노래를 잘 불렀던 낭만파 사나이. 이런 모습도 그의 일면이겠지만, 작품은 그가 너무나도 외로웠다는 사실을 절절하게 말하고 있다. 어린 시절 작가가 봤던 쓸쓸한 대갓집의 마당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느낌을 준다. 텅 비어 있고 허무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세계. 권옥연은 실제로 이런 말을 했다. “화가는 정신 연령이 다섯 살 넘으면, 그림을 못 그려.”
◇벌거벗은 자
1997년 남양주 궁집 앞에 선 권옥연. /ⓒ문선호
이런 세계 속에서 평생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그림만 그린 것은 아니다. 그는 노래를 불렀다. 이은상의 ‘가고파’를 시작하면 꼭 2절까지 불렀다. 그리고 남양주 궁집! 그것이야말로 권옥연이 품었던 노스탤지어의 끝판왕이다. 돌아갈 수 없는 함흥 고향집, 돌이킬 수 없는 과거. 그런 잃어버린 시공간을 현실에 붙잡아 두려고 시도했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는 과거의 유산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것들이 정말 사라지는 것은 결코 원치 않았다. 거기에는 서글프긴 해도 아름다운 것이 너무 많았다.
“그리움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인간은 살 수 있는 것 같다.” 권옥연을 가장 잘 이해했던 그의 딸 권이나의 말이다. 권진규(권옥연과 9촌지간)와 세자르에게 조각을 배운 권이나는 현재 파리에서 활동하는 조각가이자 화가다. 그가 준비한 권옥연 탄생 100주년 전시가 현재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다. 권옥연 부부가 눈을 감은 뒤 권이나와 동생 권유진(첼리스트)이 남양주시에 기증한 궁집도 이제는 대중에게 공개되기 시작했다. 말년에 무의자(無衣子), 즉 ‘벌거벗은 자’라는 호를 지은 권옥연은 알몸으로 이승을 떠났지만, 우리는 갤러리도 가고, 궁집도 가고, 하루하루를 향유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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