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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한국 미술사

[살롱 드 경성] 천재의 날개를 달고도, 끝내 날아오르지 못한 ‘소’....

by 주해 2023. 11. 4.

이중섭보다 먼저 ‘소’ 천착
잊혀진 비운의 화가 진환

천재의 날개를 달고도, 끝내 날아오르지 못한 ‘소’

 

천재의 날개를 달고도, 끝내 날아오르지 못한 ‘소’

천재의 날개를 달고도, 끝내 날아오르지 못한 소 아무튼, 주말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이중섭보다 먼저 소 천착 잊혀진 비운의 화가 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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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동굴 속 기도하는 소년과 이를 지켜보는 소의 모습이 담긴 '기도하는 소년과 소'(194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삼시세끼’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연예인들이 외딴 시골 마을에 정착해 자급자족하며 하루 세끼를 해결하는 예능. 전북 ‘고창편’이 기억에 남는다. 오리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고구마를 캐고, 바닷가에서 조개도 잡으면서,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한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예부터 고창은 그런 곳이었다. 산과 들과 물이 좋아 사람 살기 좋은 곳. 바다가 가까워 소식도 물자도 빠르게 유입되는 곳. 인물도 많이 났다. 전봉준, 인촌 김성수, 미당 서정주가 다 고창 사람이다.

화가도 있었다. 진환(본명 진기용·1913~1951)이다. 지금은 거의 잊혀졌지만, 1930~40년대 진환은 상당히 촉망받는 화가였다. 동갑내기 이쾌대가 가장 의지했던 친구였고, 세 살 어린 이중섭에게 미술적 영감을 물려준 선배였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미술전’에서 당당히 입상해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한국 근대미술사의 쟁쟁한 이름들이 세간에서 잊혀지고 있는 것이 당연시되는 요즘이지만, 진환이 그리된 것은 매우 안타깝다. 짧지만 빛났던 그의 생애를 이야기하려 한다.

◇봉강집 후손

진환의 1940년대 소 드로잉. 비바람을 견디는 소의 주름을 표현하기 위해, 칼로 새기듯 깊고 예리한 필선을 사용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진환은 고창군 무장면에서 1남 5녀 중 독자(獨子)로 태어났다. 태어난 집은 무장읍성의 남문 ‘진무루’ 근처였다. 진무루는 전봉준이 동학혁명을 처음 일으켜 포고문을 발표한 장소로 유명하다. 전봉준과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이 바로 진환의 할아버지 진휴년이었다. 그는 동학의 소용돌이를 직접 목도하면서, 교육만이 나라를 구할 유일한 방책이라 여겼다. 그는 1892년 가학(家學)을 위해 ‘봉강(鳳崗)’을 세웠다가 곧 호남 최초의 사립 ‘동명학교’를 설립했다. 1909년 개교한 무장보통학교의 전신이다. 재밌는 점은 동명학교의 산실이 된 ‘봉강집’이 바로 ‘삼시세끼’ 고창편을 촬영한 그 집이라는 사실. 계속 리모델링을 거쳤겠지만, 이 집은 여전히 여양 진씨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현재 진환의 조카가 관리하는 집이다.

‘흥학구국(興學救國)’을 추구한 진휴년의 뜻에 따라, 진환 일가 중에는 교육자와 독립운동가가 많았다. 진환의 아버지 진우곤은 무장면의 첫 중등교육기관인 무장농업중학교를 설립했다. 진환이 고창고보를 다닐 때 그의 후견인이던 조고모부 은규선은 고창청년회를 이끈 독립운동가였다. 1930년 전후 고창고보 학생이던 진환이 서정주와 함께 교내 독서회 비밀결사 단원이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화가의 꿈

'천도와 아이들'(1940년대). 마포 위에 크레용으로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이상향을 그렸다. 날개 달린 물고기나 봉황 같은 상상 속 동물이 등장한다. /국립현대미술관

그러나 이 험난한 시기를 통과하기에 진환의 성격은 지나치게 서정적이었다. 미술과 음악을 사랑했다. 부친은 아들을 경성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입학시켰지만, 진환의 체질에 도저히 맞지 않았다. 1년 만에 자퇴한 그는 광주와 영광을 전전하며 미술학도의 꿈을 키웠다. 마침 기독교 장로였던 매형 정태원이 진환의 꿈과 재능을 이해해 주었다. 정태원 또한 훗날 광주 수피아여고의 재건에 힘쓴 기독교계 교육 후원가였다. 6·25 전쟁 중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인민군에 총살당하며 어이없이 생을 마감했지만, 정태원은 진환을 화가로 만든 일등 공신이었다. 그는 처남을 위해 경성에서 화구(畵具)를 사다 주었고, 진환이 일본 유학을 갈 수 있도록 주선했다.

1934년 진환은 니혼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약 10년간 도쿄에 머물면서 진환은 성공한 화가로 성장했다. 예전에는 올림픽이 열릴 때 ‘미술 올림픽’도 함께 열렸는데, 1936년 손기정·남승룡이 마라톤 메달을 딴 베를린올림픽의 미술전에서 진환은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입상했다. 현재 전하는 올림픽 공식 도록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입상대에 올라선 두 마라톤 선수 사진과 함께, 전시장에 걸린 진환의 작품 사진도 나온다.

1939년 진환은 일본 신자연파협회에서 최고상인 협회상을 받아 회원이 됐고, 독립미술전에도 참여했다. 저명한 미술평론가였던 도야마 우사부로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그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도야마를 비롯한 일본 최고 화가들이 세운 도쿄공예학원에서 조교로도 일했다. 진환은 이 학원 산하 도쿄아동미술학교에서 주임을 맡기도 했다. 집안의 관심사가 ‘교육’이었에 진환은 나름대로 미술을 통한 어린이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미술 교육자의 길

1940년대 신미술가협회전 기념 사진. 가운데가 진환. /국립현대미술관

그러나 세상일이란 게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는 법. 진환에게는 짊어져야 할 집안일이 많았다. 독자였으니 결혼을 해 대를 이어야 했고 가업도 계승해야 했다. 그런 처지인데도 일본에서 들어오지 않으니, 집안에서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외조모 사망 급귀향’이라는 거짓 전보를 보낸 것이다. 1943년 진환은 ‘급귀향’해 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곧 2차 대전이 극에 달했고, 해방이 되면서 다시 일본에 가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진환이 도쿄에 두고 온 작품이 영영 사라진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진환은 조선에서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진환의 부친이 사비를 털어 만든 무장농업중학교(현 영선중고등학교)를 운영하는 일을 도와야 했다. 진환은 이 학교의 2대 교장을 맡았고, 교가도 직접 작사했다. 해방 후 서울에 미술대학이 우후죽순처럼 생기면서, 1948년 홍익대 미술대학 창설에도 관여했다. 이때 주로 서울에 머물면서 고창의 두 아들을 위해 자작 동시집을 만들어 보내기도 했다. 50편의 동시와 그림을 수록한 시화집을 책으로 내려고 출판사에 자료를 넘긴 적도 있다. 전자는 남아 있고, 후자는 전쟁 중 불타 없어졌지만. 진환은 자신이 좋아하는 미술과, 가업이자 시대의 요구였던 교육을 접목해 ‘미술 교육’이라는 새 분야를 개척하려 노력했다.

◇‘소’를 그린 화가

날개 달린 소와 소년'(1940년대). 한지에 먹으로 그렸지만, 우울하고 내면적인 작품 세계는 유럽 상징주의 영향을 반영한다. /국립현대미술관

그렇다면 진환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 그리고 싶은 그림은 어떤 것이었을까? 진환의 도쿄 시절을 기억하는 한 일본인은 그의 작품이 모두 “고국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것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는데, 과연 고국을 사랑하는 그림이란 어떤 걸까?

진환은 누구보다 열심히 ‘소’를 그린 화가였다. ‘소 그림’ 하면 우리는 가장 먼저 이중섭을 떠올리지만, 진환은 한국 근대 화가 중 가장 일찍 본격적으로 소를 그린 화가였다. 소는 조선인의 상징이다. 어떤 혹독한 환경도 견뎌내는 인내심의 상징,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지긋지긋하게 싫어했던 도상. 진환은 소가 지닌 저력에 매혹됐다. “몸뚱어리는 비바람에 씻기어 나무와 같이–소의 생명은 지구와 함께 있을 듯이 강하구나. 둔한 눈망울, 힘찬 두 뿔, 조용한 동작, 꼬리는 비룡(飛龍)처럼 꿈을 싣고, 인동넝쿨처럼 엉클어진 목덜미의 주름살은 현실의 생활에 대한 기록이었다. 이 시간에도 나는 웬일인지 기대에 떨면서 소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비바람에 씻기어” 상처를 안고도 나무둥치처럼 단단한 소를 그렸다. 무장읍성을 배경으로 평화로운 고향 마을의 자욱한 연기 사이로, 크고 작은 소가 떠다니는 초현실적인 그림도 그렸다. 구부정한 소의 등선과 고향 마을의 산 능선이 한데 어우러진 신비하고 환상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마치 신화나 전설의 한 장면 같다.

진환의 독특함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한지에 먹으로 그린 작고 내밀한 그림들이다. ‘날개 달린 소와 소년’을 보자. 신화 속 동물처럼 소는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려 하지만, 막상 한 발짝도 떼지 못한다. 소 앞에 한 소년이 고개를 떨군 채 깊이 침잠해 있다. 자유로워지고 싶지만, 뭔지 모를 현실적 조건 앞에서 좌절하고 있는 화가의 내면 세계가 아프도록 솔직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진환은 현실의 무게와 자유로운 열망 사이에서 성찰이 많았던 화가였다. 이 작품은 현대인에게도 잘 공명하는 모양인지, 몇 년 전 국립현대미술관에 걸었을 때 그림 앞에 오래 서 있는 관람객이 많았다.

◇스러진 꿈과 남겨진 것

소담한 고향 마을을 배경으로 크고 작은 소들이 초현실적으로 떠다니는 그림 '연기와 소'(194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진환의 죽음은, 많은 화가가 그랬지만, 특히 갑작스러웠다. 1951년 1·4 후퇴 때였다. 서울에서 피란을 내려가던 진환이 고향 산 변두리까지 거의 다 왔을 때 어둠이 내렸다. 어둑한 데서 걸어오는 피란민 무리를 보고, 국군 학도병이 이들을 인민군 빨치산으로 오인해 총을 쐈는데, 그 총에 진환이 맞아 즉사했다. 더 기막힌 사실은, 총을 쏜 사람이 진환의 학교 교장 시절 애제자였다는 것. 제자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통곡했다고 한다.

이 비극적 상황을 두고 진환의 친구였던 시인 서정주는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공자나 도스토옙스키에게도 그러했듯이 내게도 아직 잘 풀리지 않는 한 가지 서럽고 까마득하기만 한 의문이 남아 있다. 그것은 그 생김새나 재주나 능력으로 보아 훨씬 더 오래 살아주어야 할 사람이 문득 우연처럼 그 목숨을 버리고 이 세상에서 떠나 버리는 일이다… 유난히도 시골 소의 여러 모습을 그리기를 즐겨 매양 그걸 그리며 미소 짓고 있던 그대였으니, 죽음도 그 유순키만 한 시골 소가 어느 때 문득 뜻하지 않게 도살되는 듯한 그런 죽음을 골라서 택했던 것인가?”

비록 진환은 ‘날개 달린 소와 소년’처럼 맘껏 날아보지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그의 흔적은 조금이나마 이 세상에 남았다. 그의 작품과 드로잉, 동시집과 편지 등 자료 일체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대부분 진환의 유족이 기증한 것들이다. 그의 두 아들(진철우·진경우)은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국공립 미술관으로 보냈다. 선대에서 내려온 무형의 유산, 정신적 유산만을 후손은 그렇게 이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