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17 10:40:51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1/07/17/PPB34YFKLBEVDN45SAL6TQOM5U/
조선의 르네상스인… 시인 김기림·화가 이여성
이여성의 동생인 화가 이쾌대가 그린 '이여성 초상(194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깐다라 벽화를 숭내낸 아롱진 잔에서
쥬피타는 중화민국의 여린 피를 들이켜고 꼴을 찡그린다.
“쥬피타, 술은 무엇을 드릴까요?”
“응 그 다락에 얹어둔 등록(登錄)한 사상일랑 그만둬.
빚은지 하도 오래서 김이 다 빠졌을걸.
오늘 밤 신선한 내 식탁에는 제발
구린 냄새는 피지 말어.”
쥬피타의 얼굴에 절망한 웃음이 장미처럼 희다.
(중략)
쥬피타 승천하는 날 예의(禮儀) 없는 사막에는
마리아의 찬양대도 분향도 없었다.
길 잃은 별들이 유목민처럼
허망한 바람을 숨쉬며 떠 댕겼다.
허나 노아의 홍수보다 더 진한 밤도
어둠을 뚫고 타는 두 눈동자를 끝내 감기지 못했다.
-김기림 ‘쥬피타 추방-이상의 영전에 바침’ 중에서
해방된 다음 날 해방 기념 연설회장인 휘문고보에 들어서는 여운형(가운데)과 이여성(오른쪽).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천재 시인 이상의 ‘절친’
1937년 도쿄에서 ‘불령선인(불온한 조선인)’으로 몰려 구치소 생활을 한 뒤 건강 악화로 스물일곱 짧은 생을 마감한 시인 이상(1910~1937)을 애도하며, 친구인 시인 김기림(1908~?)이 쓴 시다. 폐결핵을 앓던 이상은 늘 창백한 얼굴을 했는데, 김기림은 그 하얀 이상을 ‘쥬피타’ 즉 ‘제우스’ 조각상에 비유했다. 세계의 역사와 현재를 통찰하며, 오래되어 ‘김빠진’ 사상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고고하고 도도한 이상을 말이다. 신(神) 중의 최고 신 제우스는 숭배받아 마땅한데, 대체 이 사회는 왜 그를 ‘추방’했던 것일까? 그 명명한 눈동자를 끝내 감지도 못하게 하고.
멋지고 찬란한데 이상하게 슬픈 이 시는 이상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김기림이기에 쓸 수 있었던 시다. 이상도 살아생전 김기림을 참 좋아하고 따랐다. 이상이 김기림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어보면, 그가 김기림에게 느꼈던 애정의 깊이를 알 수 있다. 1936년, 김기림의 첫 시집 ‘기상도(氣象圖)’를 직접 디자인해준 이도 이상이었다. 내용으로도 형식으로도, 1930년대 출간된 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세련된 감각의 시집! ‘기상도’라는 제목에 맞게 은하수를 형상화한 은박 두 줄이 표지를 세로로 가로지른, ‘모던’의 끝판왕 디자인을 갖춘 시집이었다.
이상이 디자인한 김기림의 ‘기상도(1936)’ 표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사 공부한 사회부 기자, 김기림
이상이 좋아했던 시인 김기림도 이상만큼이나 천재적인 인물이다. 함경북도 성진 출신으로, 보성고보 중퇴 후 도쿄 니혼대학 예술과에서 수학했다. 일본 내에서도 “수재라기보다 천재를 자부하는 활발한 젊은이”들이 모였다는 니혼대학 예술과는 개방적인 교수진과 자유로운 학제 덕분에 뛰어난 조선인도 많이 다녔다. 문인으로 김기림, 마해송, 임화, 화가로는 구본웅, 김환기, 박고석, 이우환 등이 이 학과 출신이다. 당시 예술과 커리큘럼은 좀 특이해서, 문학과 철학, 그리고 미술사를 한 학부에서 같이 가르쳤다. 김기림이 후에 미술평론 관련 글을 쓰고 화가들과 친하게 지낸 것은 그가 미술사의 기초를 여기서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김기림은 귀국하자마자 1930년 조선일보 첫 공채 기자 모집에 응시하여, 22세 최연소 나이로 합격했다. 입사해서 사회부로 배정받은 첫 출근 날, 빠르게 돌아가는 편집국의 인상을 김기림은 ‘미술사를 공부했던 문인’ 특유의 관점으로 묘사한 바 있다. 이탈리아 미래파 이론가인 ‘마리네티’가 달리는 말의 움직임을 동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26개의 다리'를 그려야 한다고 주창한 것을 떠올리며,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편집국에 들어선 첫날에 한 시 마감 시간을 좌우하여 모든 테이블 위에서 원고지를 만지는 기자들의 손가락의 회전은 실로 ‘프로펠러’와 같이 보였다. 그리고 사회부장은 50개 이상의 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러냐 하면 간단없는(끊임없는) 전화가 그를 습격하기 위하여 모든 순간순간에 그의 테이블 위에서 소리치고 있으니까.”
이여성의 1935년 작품 '수국송뢰'. 즉 '물이 자욱한 곳에 소나무의 울림소리 들린다'는 뜻의 운치 있는 제목의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사학자·화가·기자… 조선의 르네상스인
김기림이 처음 조선일보 편집국에 들어섰을 때 목격했던, “50개 이상의 귀를 가진 사회부장”은 이여성(1901~?)이다. ‘여성(如星·별같이)’이라는 특이한 이름은 본명이 아니고, 유명한 ‘약산(若山·산같이)’ 김원봉, ‘약수(若水·물같이)’ 김두전과 의형제를 맺을 때 지은 이름이다. 이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조선의 독립운동에 헌신했는데, 이여성은 후에 이 시대 최고의 다재다능한 지식인이 되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에서 두루 부장직을 역임한 언론인이면서, 이집트, 베트남, 인도 등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사학자였고, ‘숫자조선연구’를 발간하여 ‘숫자’라는 객관적 데이터로 조선의 특성을 잡아내고자 했던 철저한 실증주의 사회학자였을 뿐 아니라, 동양화론을 쓰고 ‘조선미술사개요’를 집필한 미술사가였다. 해방 직전 ‘조선건국동맹’이라는 지하조직에서 활동하며, 여운형의 오른팔이던 정치인이기도 했다.
이여성이 그린 심훈 소설 '상록수'의 면화(1936). /국립현대미술관
그뿐인가. 이여성은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던 화가였다. 1935년에는 청전 이상범과 ‘2인전’을 열 정도였으니까. 1936년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신문사에서 쫓겨났을 때는 틀어박혀 ‘역사화’ 그리는 일에만 몰두했다. 역사화는 서양에서는 매우 발달한 장르였지만, 동양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그려진 주제였다. 그러나 이여성은 역사화야말로 조선의 역사를 기록하고 이를 후대에 시각적으로 알리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인식했던 것 같다. 그는 김유신, 장보고, 김정호, 박연 등 위인들의 일화를 역사화로 그려 신문에 발표하는 일에 열의를 다했다.
이여성이 그린 ‘격구도(1938)’. /한국마사회 말박물관 제공
애석하게도 그의 역사화 원화들은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재는 ‘격구도’ 딱 한 점이 전한다. ‘격구(擊毬)’는 일제강점기에는 이미 사라진 전통 무예의 하나로, 말에 올라탄 채 막대기를 이용해 공을 멀리 보내는 경기의 일종이다. 선조의 용맹한 기상과 격조 높은 문화를 기록하기 위해, 그는 경국대전과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격구에 대한 글을 깨알같이 상단에 적어 놓았다. 이 그림이 철저한 고증에 기초한 것임을 확인시켜 주는 작업이다.
실증주의 관점을 중시했던 학자답게 그는 역사화를 그리기 위해 각 시대의 의상, 즉 ‘복식’도 연구했다. 급기야 1947년 ‘조선복식고(朝鮮服飾考)’라는 책을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이여성이 직접 그린 도판과 사진이 실렸다. 지금도 복식사 연구의 선구적 업적으로 평가받는 책이다.
이여성의 '조선복식고(1947)'. /국립현대미술관
◇문학에서 정치까지 교감한 직장 선후배
문학, 예술, 역사, 정치에 두루 통달했던 두 사람, 김기림과 이여성이 조선일보 편집국에서 직장 선후배로 만나 서로 의기투합했을 것임은 쉽게 짐작된다. 비록 일곱 살 차이가 났지만, 신문사에서 함께 일하며, 실학자 정약용의 자취를 찾아 양수리를 방문하고, 도자기 파편을 같이 주우러 다니기도 했다. 그들은 ‘울고 짜는 애절한’ 조선이 아니라 ‘당당하고 자존감 높은’ 조선을 분석적, 실증적으로 발굴하는 일에 공통된 관심을 지녔다.
이여성이 동생 이쾌대의 결혼 선물로 준 ‘사계산수’ 병풍 중 '여름(1934)'. /국립현대미술관
우정도 각별했다. 1931년 김기림이 결혼해서 남산 밑에 신혼살림을 차린 이튿날 밤, 첫 손님으로 이여성이 방문했다. 그가 신혼집에 들고 온 선물은 커다란 튤립 화분! 당시 ‘울금향(鬱金香)’이라고 불렸던 서양 화초였다. 김기림은 이때를 회고하며, ‘붉은 울금향과 로이드 안경’이라는 자신의 수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이형(이여성)을 생각할 때마다 초동양류(超東洋流)의 위대한 콧마루 위에 걸려서 끊임없이 약소민족의 대국(大局)을 통찰하는 검은 로이드 안경과 튤립 붉게 향내 나던 그 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이여성 동생은 화가 이쾌대
튤립 화분을 들고 있지는 않지만, 당시 지식인의 상징인 ‘로이드 안경’을 쓴 이여성 모습은 남아있다. 이여성의 동생인 화가 이쾌대가 그린 초상화에 말이다. 한복을 입고 책상다리를 한 채, 소반 위에 책을 펼쳐 턱을 괴고 독서에 심취한 이여성의 모습이다. 그는 실제로 이렇게 안경을 끼고 늘 열심히 공부했을 것 같다. 미술이론가이기도 했던 이여성은 동생 이쾌대의 작품 경향에도 영향을 미쳐, 이쾌대 그림에는 이여성의 미술 이론이 적절히 적용되고 있다. 서양화를 그리면서도 조선의 유려한 선(線)을 강조한 표현을 통해 ‘조선식’ 유화를 창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1940년대 이여성의 동생 이쾌대가 자신을 그린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화가로서의 자존감이 당당하게 표현된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