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6 11:5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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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태·김중현·배운성… ‘근대 미술의 숨은 후원자’ 정무묵
작년 현대 한국화의 거장 서세옥(1929~2020)이 작고한 후, 올해 그의 작품·자료가 모두 공공 미술관에 기증됐다는 기사가 났다. 국립현대미술관과 대구미술관뿐 아니라 그가 살던 성북구의 구립미술관에 유품 대부분을 기증했다. 자신의 작품 450여 점, 드로잉과 전각 등 자료 2300여 점, 그가 애장했던 소장품 990여 점까지 전부 기증 목록에 포함됐다.
이 모든 것을 공공기관에 보낸다는 결정에는 작가 자신보다 유족의 뜻이 강했다. 물론 상속세에 대한 부담이 컸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막상 중요한 유품을 기증할 때 ‘이건 정말 아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기증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필자는, 서세옥의 부인 정민자(83) 여사와 장남 서도호 작가의 ‘단호함’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중요한 것을 개인이 관리할 수 없습니다. 모조리 공공기관에 보내서 그곳에서 관리해주면 감사한 일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예술품을 사랑하되 그것을 ‘개인’ 자산으로 생각하지 않고 ‘공공’의 유산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어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이고 바람직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결단이다. 정민자 여사의 담대한 태도를 보면서, 그녀의 부친 정무묵(1907~1984)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거의 기억하는 이 없지만, 근대 미술사의 빛나는 화가들 이름 옆에서, 그들의 ‘친구’이자 ‘후원자’로 등장하는 기업인 정무묵! 그의 이야기를 여기 기록해 두고자 한다.
◇최초의 조선인 자동차 정비 회사 사장
사촌 사이인 정무묵·정형묵은 한국 자동차 산업사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인물이다. 조선에 자동차가 들어온 것은 1903년 고종이 탄 ‘어차’가 처음인데, 1920년대에는 그 수가 급격히 증가해 1922년 경성에서는 택시 256대가 첫 영업을 시작할 만큼 성장했다고 한다. 이 무렵 을지로 6가에 최초로 조선인이 운영하는 자동차 정비 회사, ‘경성서비스공업사’가 문을 열었으니, 이 회사 창립자가 바로 정무묵·정형묵이었다.
이들은 미국인 헨리 콜브런의 전문 정비 공장에서 기술을 배운 후 이 회사를 설립했다. 절정기인 1930년대 초에는 직원 300여 명을 두고 국내 정비 업무의 60%를 도맡을 만큼 성장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정비 업무뿐 아니라, 외국 차(포드)를 직수입하는 일도 하고, 국산 버스를 자체 생산하기도 했다. 정무묵의 딸이자 서세옥의 아내인 정민자는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그 버스를 타고 피란 간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김종태·김중현 등 화가 후원
시대의 유행을 선도한 사업가 중에는 예나 지금이나 예술을 사랑하는 이가 많다. 정무묵도 예외가 아니었다. 주로 호떡으로 끼니를 때워 ‘호떡 사장’이란 별명을 지닐 만큼 구두쇠였지만, 골동을 수집하고 예술가 친구들을 후원하는 일에는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 정무묵이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진 전통 미술품으로는 인평대군 이요, 김홍도, 이인상 등의 조선 회화가 주를 이루었고, 신라시대 금귀걸이를 비롯한 금속 공예품이 꽤 되었다. 도자기와 민예품도 있었다.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소장가 집에는 당대 예술가들이 완상(玩賞)을 위해서라도 모여들게 마련이다. 그의 시대, 정무묵의 예술가 친구로 먼저 화가 김종태(1906~1935)를 들 수 있다. 김종태는 초등학교 선생을 하면서 독학으로 서양화를 그려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연이어 특선을 거머쥐며 조선인 최초로 ‘서양화 추천 작가’가 된 인물이다. 붓질 몇 번만으로 대상의 인상을 확실하게 포착하는 탁월한 재주로 유명하다. 대표작 ‘노란 저고리’(1929)는 불과 23세에 그린 소녀상으로, 필자의 학창 시절 교과서 단골 작품이었다.
김종태, <노란 저고리>, 1929 /국립현대미술관
그런 김종태가 1935년 평양에 개인전을 하러 갔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스물아홉의 생애를 어이없이 마감하게 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친구들이 경성의 명치제과에서 유작전을 열어주었는데, 그 친구 중 하나가 정무묵이었다. 정무묵은 이 전시에 출품된 김종태의 마지막 작품 ‘석모(夕暮·해 질 녘) 주암산’을 사주었다. 작품 뒷면 작가 사인을 보면 “1935년 7월, 평양에서”라고 적혀 있는데 그는 그해 8월에 숨을 거두었다. 그 사실이 너무 애틋했던 걸까? 정무묵은 이 작품을 곁에 두며 “이게 김종태의 마지막 작품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은 확실하게 김종태가 그린 그림으로 전해지는 유화 넉 점 중 한 점이다.
김종태, <석모 주암산>, 1935 /국립현대미술관
1935년 열린 김종태 유작전 기념 사진. 뒷줄 맨 왼쪽 안경 낀 사람이 정무묵이다. 전시장 중간에 작품 ‘석모 주암산’이 걸린 게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김중현(1901~1953)도 정무묵이 좋아했던 화가였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전차 차장, 점원, 제도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매년 5월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릴 때면 어떻게든 작품을 출품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김중현은 서양화부와 동양화부 모두에서 특선을 거듭했다. 어차피 독학으로 공부한 것이니, 양쪽 그림을 다 잘 그린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1936년 제1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춘양(春陽)’은 동양화부 특선작이다. 따스한 봄볕에 대가족이 주인, 하인,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여서 식사를 준비하는 평범한 일상을 담았다. 한옥의 건축 구조물과 벽에 걸린 그림, 창호지의 얼룩까지도 눈앞에 펼쳐진 듯 생생하게 묘사한 이 작품도 한때 정무묵 소장품이었다. 그가 소장했던 작품은 대체로 가난한 화가 것이 많았다.
김중현, <춘양>, 1936 /국립현대미술관
◇백인기 가옥 사들여 예술가 사랑방으로
정무묵은 사업 성공으로 일찌감치 부를 축적해서, 1940년대 초 ‘명륜동 1가 36-18번지’에 있는 상당히 큰 한옥을 살 수 있었다. 조선 제일의 갑부로 통하는 백인기가 살던 집이었다. 이 집에는 사랑채가 둘이나 있었는데, 이곳은 당연하게도 정무묵 주변 예술가들이 모여 먹고 자고 대화를 나누는, 말 그대로 ‘사랑방’이 되었다. 그의 고향 선배 청전 이상범도 자주 이 사랑채에 드나들었다.
우연하게도 이 한옥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 남아있다. 배운성의 1930년대 작품 ‘가족도’라는 작품에 말이다.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전형적 한옥 구조물 안팎으로 인물을 총 17명 그린 대규모 그룹 초상화다. 이 작품은 이 집 전 주인 백인기의 대가족을 그린 것이지만, 집은 정무묵이 살던 때도 그 모습 그대로였다.
배운성이 1930년대 전반 백인기 가족과 자신(맨 왼쪽)을 그린 '가족도'. 배경으로 등장하는 서울 명륜동의 백인기 가옥은 이후 정무묵 소유가 됐다. /국립현대미술관
배운성(1901~1978)은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백인기 집안의 서생으로 들어가, 백인기의 아들이 1922년 독일로 유학 갈 때 ‘매니저’로 따라나섰다가 화가가 된 인물이다. 그는 독일 체류기에 이 작품을 제작해 1935년 함부르크박물관에서 전시한 바 있다. 한국의 전통 가옥과 인물, 의상 등 유럽인들 눈에 충격적으로 이국적이었을 이 작품의 배경이 바로 정무묵의 명륜동 집이다.
배운성은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를 피해 파리에서 급히 경성으로 귀국해, 당연하게도 백인기의 옛집을 찾았을 텐데, 이미 백인기는 없고 집의 새 주인 정무묵이 있었다. 그러나 ‘생존력 최강의 화가’ 배운성은 정무묵과도 곧바로 친해졌다. 정무묵은 일제 말 배운성의 후원자 역할도 했다. 이 집은 1961년 신상옥 감독의 유명한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촬영지로도 쓰였다는데, 지금 그대로 남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옛 지도를 보며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정무묵의 명륜동 한옥에서 찍은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한때 예술가가 드나들고 여운형이 머물던 사랑채에서 ‘사랑방 손님’이 묵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여운형 피신 도와
정무묵의 명륜동 사랑채는 해방되자 잠시 정치가의 집합소가 되었다. 정무묵이 해방 직후에는 정치인 ‘여운형’을 후원했기 때문이다. 해방기 건국준비위원장을 지낸 당대 정치인 인기 순위 1위, 중도 좌파의 거두 여운형 말이다. 여운형의 일대기를 보면, 1945년 8월 15일 해방되던 날 새벽 누군가 ’1938년형 스튜드베이커(Studebaker)’ 검은색 리무진 한 대를 집 앞에 보냈다는 얘기가 나온다. 오로지 여운형을 존경하는 마음 하나로, 건국 준비에 보탬이 되라는 이유에서 자동차와 기사를 딸려 보낸 사람, 그가 바로 정무묵이었다.
여운형의 재동 집이 폭탄 테러를 당한 후에는 정무묵이 아예 여운형을 자신의 명륜동 사랑채로 모셔 왔다. 1947년 7월 19일 암살 당일에도, 여운형은 이 명륜동 집에서 나와 길을 나서다가 변을 당했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정무묵의 부인이 만든 국수를 먹기 위해 일부러 잠시 점심에 들러 식사를 하고, 그 스튜드베이커 자동차를 타고 혜화 로터리를 빠져나올 때, 여운형은 차 안에서 총을 맞았다. 정무묵의 딸이자 정민자의 언니가 함께 타고 있던 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