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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이 정의라 믿은 독재자 나폴레옹… 러시아 눈밭서 신화는 끝났다 [나폴레옹 다시 보기] ......... [下] 제국의 종말

by 주해 2022. 12. 10.

[나폴레옹 다시 보기] [下] 제국의 종말

1811년경, 나폴레옹은 권력의 정점에 섰다. 유럽 대부분 지역이 같은 법률과 행정 체제를 따랐고, 모두 프랑스에 군 병력을 제공해야 했다. 2~3년 후 이 체제가 종말을 맞으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제국 체제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외국의 침략과 지배를 받는 나라에서 민족 감정이 분출하는 것은 정해진 이치다. 한번 제국 체제에 균열이 생기면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등 피압박 국가들이 곧장 저항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프랑스 내부적으로도 왕당파, 공화파, 가톨릭 세력 등 다양한 집단이 다양한 이유로 체제에 저항했다.

하얀 눈이 수의처럼 내려앉았다, 비참했던 러시아 침공 후퇴의 길 - 나폴레옹도 러시아의 겨울을 이길 수는 없었다. 1812년 여름, 60만 대군으로 진군했던 나폴레옹군은 러시아군의 지연 전술에 당하며 항복을 받아내지 못했고, 10월 말 후퇴를 시작했다. 극심한 추위 속에 식량 부족이 겹치고 전염병까지 번졌다. 병력 57만명, 말 20만 마리, 1050문의 대포를 잃었다. 독일 화가 아돌프 노르텐의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퇴각’(1851). 올해 1월엔 폼페이오 당시 미 국무장관이 “트럼프 정부만큼 러시아를 터프하게 압박한 정부는 없었다”는 트윗을 올리자, 러시아 외무부가 “터프 가이들, 이게 자네들 길이라네”라는 말과 함께 이 그림을 트윗하며 맞대응하기도 했다. /위키피디아

그 전에 나폴레옹 자신부터 문제였다. 그는 황제가 된 후 권력에 도취되어 균형을 잃었다. 1806년에는 자기 생일인 8월 15일을 성 나폴레옹 축일로 선포했고, 아이들에게 제국 교리문답을 부과했다. 몰락의 길을 걷는 모든 독재자의 공통점은 자신만이 정의롭고 유능하다고 믿고 비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나폴레옹은 여느 독재자와 다를 바 없다. 결과적으로 나폴레옹 체제는 합리적 전략 전술 대신 모험의 연속이었다.

나폴레옹은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인가? 최근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다소 부정적이다. 그의 전술은 사실 단순하다. 가능한 한 최대의 전력을 집중하여 적의 중심을 깨는 것이다. 나폴레옹 자신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 가지만 본다. 적의 몸통! 그것을 깨면 부차적 문제는 스스로 정리된다.” 이런 전술의 실상은 무엇일까? 엄청난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주 재앙에 가까운 희생을 치렀다. 1813년 6~9월 스페인과 독일 지역에서 치른 전투에서 프랑스군 15만명이 사망했고, 라이프치히 전투 때 또 7만명이 사망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유능하다기보다 냉혹한 장군이었다.

나폴레옹이 겪은 최악의 실패는 러시아 침공이다. 러시아는 대륙 봉쇄 정책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고, 폴란드에서 프랑스의 이해를 침해하려 했다. 이 사태를 방치하면 안 된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선수를 쳐서 러시아 침공을 결정했다. 20국 출신의 병력 60만명으로 대군을 구성하여 1812년 6월 24일 네만강을 넘었다. 원정군으로서는 빨리 결전을 벌여 승리를 거머쥐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이를 간파한 러시아는 전투를 피하며 시간을 끌었다. 9월 7일에 가서야 보로디노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여기에서 승리를 거둔 대군은 모스크바로 진격해 갔다.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전쟁이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항복하지 않았다. 러시아군의 쿠투조프 장군은 스스로 초토화작전을 벌였다. 9월 15일부터 20일까지 모스크바가 화염에 휩싸였다. 나폴레옹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다만 성스러운 도시를 불태운 적그리스도라는 오명만 얻었다. 추위와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대군은 10월 말 후퇴를 결정했다.

도망가는 프랑스 대군 위로 수의(壽衣)를 입히듯 눈이 내렸다. 러시아의 동장군(冬將軍·General Winter) 앞에서 프랑스군은 맥을 못 추었다. 이해 유독 극심한 겨울 추위 속에 식량 부족과 전염병으로 대군은 궤멸 직전이었다. 말이 죽어 쓰러지면 곧 배를 갈라 따끈한 내장을 꺼내 먹었다. 인육도 먹는 지경이고, 심지어 옆 사람의 빵을 훔치기 위해 살인도 주저하지 않았다. 낙오된 병사들은 러시아 농민들에게 잡혀 참혹한 고문 끝에 죽었다(투르게네프의 소설에서 보듯 강의 얼음을 깨고 밀어 넣으며 ‘파리까지 헤엄쳐 가라’고 놀렸다). 뒤에서는 쿠투조프 장군이 맹렬히 추격해 왔다.

“나폴레옹 못 나오게 막아” - 프로이센군 폰 블뤼처(왼쪽) 장군과 영국군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가 나폴레옹을 쓰레기통에 넣고 뚜껑을 닫으려는 것처럼 묘사한 풍자화(1815). /위키피디아

12월 5일 나폴레옹은 처남 뮈라에게 지휘를 맡기고 자신은 급히 파리로 돌아가 군을 재조직하려 했다. 4일 후 리투아니아의 빌뉴스(당시 이름은 빌나)에 도착한 군인 수는 이제 수만 명 수준으로 줄었다. 티푸스가 돌아서 매일 아침 시체들이 수두룩하게 쌓였다. 이때 코사크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빨리 100㎞를 행군하여 네만강을 건너야 목숨을 구한다. 후위를 지키는 미셸 네(Michel Ney) 장군 부대의 헌신으로 생존자들은 무사히 도강했다. 이 때문에 네 장군은 ‘러시아에 제일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나폴레옹도 그를 ‘용맹한 자 중 가장 용맹한 자’라고 칭했다. 빌나에 도착한 러시아 군은 수천구의 시체, 말 시체,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부상병까지 한 번에 땅에 묻었다!

최악의 패배였다. 병력 57만명, 말 20만마리, 1050 문의 포를 잃었고, 무엇보다 불패의 신화가 깨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영국군이 스페인으로 침공해 왔다. 반대편에서는 러시아가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진격해 왔다. 곧이어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 스웨덴이 제6차 반불동맹을 맺고 백만 대군으로 쳐들어왔다. 1814년 3월 31일, 동맹군이 파리에 입성했을 때 나폴레옹은 퐁텐블로 성의 자기 방에서 고독하게 최후를 기다렸다. 한때 독약을 먹고 자살할까 고민했지만 결국 퐁텐블로에서 양위한 후 지중해의 엘바섬으로 추방되었다.

최후의 종말 전에 짧은 반전이 일어났다. 나폴레옹은 사제들과 망명 귀족들의 귀환으로 앙시앵레짐이 재건되는 게 아닌지 두려워하는 민중의 심성에 기대 재기를 노렸다. 엘바섬을 탈출한 후 600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쥐앙만에 상륙했고, 긴 행군 끝에 파리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이 파리로 진군해 오는 동안 정부 기관지인 ‘르 모니퇴르 위니베르셀’지의 헤드라인은 매일 변화해 갔다. ‘식인종 자기 소굴에서 탈출’ ‘코르시카의 식인귀 쥐앙만에 상륙’ ‘괴물 그르노블에서 숙영’ ‘독재자 리옹을 지나다’ ‘찬탈자 수도에서 60리외까지 근접’ ‘보나파르트가 전진해 온다’ ‘황제께서 퐁텐블로 도착’ ‘황제 폐하께서 어제 파리에 입성하시다’.

나폴레옹은 제국을 재건한 후 입헌주의를 약속하고, 이웃 국가들에 평화조약 체결을 제안했다. 그렇지만 유럽 각국은 이 괴물의 말을 믿는 대신 확실하게 꺾어놓는 게 낫다고 결정했다.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사실 워털루는 영국 웰링턴 장군의 캠프가 있던 곳이고, 실제 전장(戰場)은 브렌랄뢰(Braine-l’Alleud)였는데, 영국인들은 발음하기 불편한 이 지명 대신 ‘워털루 전투’라고 불렀다. 승자가 전투 이름까지 편하게 결정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두 번째로 양위했다. 1815년 11월 30일 체결된 2차 파리조약은 1년 전보다 훨씬 엄격했다. 사부아와 니스, 그 외 프랑스 동부와 북부의 여러 곳에서 영토를 빼앗았다. 프랑스가 두 번 다시 침략하지 못하도록 네덜란드(벨기에는 이 당시 네덜란드에 속했다가 1830년에 독립했다), 피에몬테-사르데냐, 프로이센(폴란드 쪽 땅을 러시아에 양도하고 대신 라인 지방 땅을 받았다) 등 주변 국가들의 힘을 키워 프랑스를 둘러쌌다. 나폴레옹 자신은 또다시 탈출하지 못하도록 대서양의 고도(孤島) 세인트헬레나섬에 유폐했다. 이렇게 역사의 거대한 물결이 또 한 차례 흘러갔다.

[나폴레옹 최후의 장군, 미셸 네]

반역죄로 총살형 받자 “마지막 명령을 내린다, 내 심장을 향해 발사!”

용맹함으로 명성 떨친 네 장군 - 나폴레옹이 ‘용맹한 자 중 가장 용맹한 자’라 불렀던 미셸 네 장군. 샤를 메이니에르의 1805년작, 베르사유궁 소장. /위키피디아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네 장군도 체포되었고, 반역죄로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그는 엘바섬에서 탈출하여 파리로 행진해 오는 나폴레옹을 체포하라고 보냈더니 나폴레옹 편으로 넘어갔고, 마지막 전투까지 나폴레옹과 함께 싸웠다.

변호사 앙드레 뒤팽은 그의 무죄를 끌어내기 위해 나름 ‘신의 한 수’를 시전했다. 1815년 파리 조약으로 네 장군의 고향 자르루이(Sarrelouis)가 프로이센 영토가 되어서 이제 네 장군은 법률상 독일인이니 프랑스 법정에서 재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말을 들은 네 장군은 벌떡 일어나 외쳤다. “나는 프랑스인이고 앞으로도 프랑스인으로 남을 거요!” 결국 그는 사형선고를 받아서 뤽상부르 공원 근처에서 처형당했다.

눈가리개를 거부한 그는 스스로 사형 집행을 명령할 마지막 권리를 행사했다. “병사들이여, 내가 발사 명령을 내리면 내 심장을 향해 쏴라. 그것이 마지막 명령이 될 것이다. 나는 재판 결과에 항의한다. 나는 프랑스를 위해 백번의 전쟁을 했지만 단 한 번도 프랑스에 대항해 싸운 적이 없다. 병사들, 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