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5 09:50:28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1/06/25/T25PLUDZ7BGGBKTLPDCULISUKI/
세대교체와 나라의 운명
한일 근대사에서 자주 비교되는 두 공간이 있다. 서울 북촌의 박규수 사랑방과 야마구치현 하기의 요시다 쇼인 촌숙(村塾)이다. 19세기 중·후반 10년 시차를 두고 이 공간들에서 20대 진보적 신세대 그룹이 배출됐다. 요시다의 제자들은 세대교체에 성공해 나라를 지배했고 촌숙은 메이지유신의 상징으로 보존돼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됐다. 박규수의 문인들은 시대의 주역이 되지 못했다. 사랑방은 사라졌고 그 자리는 지금 헌법재판소 뒷마당으로 변했다.
갑신정변 실패 후 1885년 망명지 일본에서 찍은 주역들의 사진.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을 탈출하지 못한 홍영식과 박영교는 청군에 참살됐다. 김옥균은 9년 후 중국 상하이에서 고종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 박규수의 문인 중 일제강점 후에도 호의호식한 사람은 철종의 사위 박영효 뿐이다.
◆쟁쟁했던 조선 신세대, 그러나
경력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서울 명문 거족 출신이다. 중국 사신으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현실을 직접 목격했다. 병조·이조참판, 평안도 관찰사, 한성부윤 등 요직을 지냈다. 실학의 계승자이자 개화 사상의 선구자였다. 오경석·유대치 등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상가를 곁에 두고 10년 넘게 후학을 길렀다.
하급 무사 출신인 요시다 쇼인은 영주에게서 천재로 인정받아 난학(蘭學)과 병학(兵學)을 체계적으로 학습했다. 하지만 변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두 차례 밀항을 시도했다가 실패해 옥살이를 했다. 막부에 대들다가 목이 잘려 죽은 때가 29세였다. 박규수보다 23년 늦게 태어났으나 18년 먼저 죽었다. 숙부에게 물려받은 쇼카(松下) 촌숙에서 후학을 길러낸 시기는 불과 2년 정도다.
제자들도 달랐다. 박규수 사랑방엔 과거에 급제한 서울 명문가 수재들이 드나들었다. 왕의 사위(박영효)와 영의정의 아들(홍영식)까지 있었다. 수신사·시찰단 등으로 전원이 일본과 미국을 다녀왔고 문명 개화를 지지했다. 당대 최고의 20대 엘리트로 이뤄진 드림팀이었다.
요시다의 촌숙은 변방의 하급 무사로 채워졌다. 이들의 사상적 지평은 유신 직전까지 천황을 받들어 서양 오랑캐를 내몰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수제자 4명이 외세, 막부와 싸우다 모두 20대에 죽었다. 촌숙의 신세대 그룹이 문명 개화로 질적 변화를 일으킨 것은 열등생 그룹이 양이를 포기하고 유학에 나선 이후였다. 그중 한 명이 농민 출신 이토 히로부미다. 그가 칼 대신 영일(英日)사전을 옆구리에 차고 영국으로 떠났을 때가 22세였다.
1863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 야마구치 신진 엘리트 5명. ‘죠슈5’로 불린다. 사진 속 상단 오른쪽이 이토 히로부미, 하단 왼쪽이 이노우에 가오루다. 요시다 쇼인의 쇼카촌숙 제자들이다. 이들의 유학을 기점으로 일본의 흐름은 반외세에서 문명 개화로 전환했다. 이토는 초대 총리 등 네차례 총리를 맡았고 이노우에는 대장·내무·외무대신을 역임했다. 둘 다 한국과 악연이 있다.
◆250년 만의 능력주의 시대
두 나라 신진 엘리트의 신분 차이는 역설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일본은 질이 상대적으로 낮았으나 문호를 하층에 개방해 인재군(群)을 획기적으로 늘렸다. 인재를 배출한 사숙(私塾)이나 사당(私黨)은 요시다의 촌숙만이 아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를 배출한 오사카의 데키주쿠(適塾),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를 배출한 가고시마의 세이추구미(精忠組)가 대표적이다. 일본 근대를 만든 이들은 모두 하급 무사 출신이다.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지방 영주들이 각자도생을 위해 발탁 경쟁을 벌였다. 실력이 신분을 결정하는 능력주의 시대가 전국시대 종결 이후 250년 만에 돌아왔다. 이 경쟁에서 승리한 지역을 웅번(雄藩)이라고 한다. 웅번 4곳의 하급 무사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거대 세력을 만들었다. 막부조차 가쓰 가이슈와 같은 하급 인재를 발탁해 세대교체를 시도했다. 청년 전성시대였다. 그들은 유신으로 권력을 쟁취한 뒤 중앙집권화를 통해 자신을 키워준 웅번까지 삼켜버렸다.
박규수 사랑방의 제자들은 고립된 섬과 같았다. 고종에 의해 중앙 정계에 발탁된 수제자 그룹은 갑신정변으로 죽거나 망명했다. 홍영식은 29세, 박영교는 35세에 청군에 살해됐다. 김옥균은 망명지를 떠돌다가 43세에 암살당했다. 김홍집과 어윤중이 아관파천 때 참살되자 조선의 개혁 지사(志士)는 씨가 말랐다. 그 후에도 조선이 신세대를 멀리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젊을 뿐 새롭지 않았다. 내부대신 이지용이 늑약에 서명해 을사오적이 된 나이는 불과 35세였다.
◆능력만큼 중요했던 천명(天命)
유신 직전에 양이론자였던 천황이 세상을 떴다. 36세였다. 15세 천황이 뒤를 이었다. 천황부터 세대교체됐다. 사망 시점이 너무나 절묘해 지금까지 암살설이 돈다. 구세력의 정점인 막부의 쇼군(將軍)도 그 무렵 세상을 등졌다. 개혁 성향의 쇼군이 뒤를 이었다. 그는 스스로 정권을 천황에게 바쳤다. 이 세대교체가 없었다면 유신은 성공했어도 엄청난 피를 흘렸을 것이다.
신진 그룹 내부에서도 맹렬한 세대교체가 일어났다. 선두 그룹인 극단적 양이론자들은 막부와의 싸움에서 대거 죽었다. 유신을 성공시킨 이른바 영웅 삼걸(三傑)도 유신 10년 후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떴다. 사이고는 하급 무사를 대표해 중앙집권화에 저항하다가 자결했고, 오쿠보는 독재 정치를 하다 암살당했다. 성공과 함께 개혁의 걸림돌이 된 사무라이 기득권과 유신 영웅의 권위주의가 이들의 죽음으로 한꺼번에 정리됐다.
촌숙의 열등생 이토 히로부미 등이 그들의 뒤를 이었다. 농민 출신으로 일본 최고 권력자(초대 총리)가 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그가 처음이다. 스승 요시다는 그에 대해 “재능은 떨어지고 학문은 미숙하지만 성격은 곧고 꾸밈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집권했을 때 그는 해외 시찰을 통해 미국과 유럽 신문물에 달통한 선각자로 변해 있었다. 서구의 정치·사법·재정 제도를 섭렵해 일본에 국회와 헌법, 재정의 기초를 완성했다. 한국을 집어삼켜 일본을 열강에 올린 것도 그였다.
일본 나가사키 가자가시라(風頭) 공원에 서 있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동상. 오른쪽 깃발은 그가 운영했던 주식회사 '가이엔타이' 깃발이다. 하급 무사였던 료마는 1865년 서로 원수지간이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을 극적으로 화해시켰다. '삿초동맹'은 메이지 유신의 실질적인 추진 동력이었다. 이어 막부에 권력을 천황에게 돌려주는 대정봉환을 제안해 실현시켰다. 대정봉환 한 달 뒤 료마는 암살당했다. 32세였다. 19세기 말 일본은 목숨을 건 혁명가들이 변혁을 이끌었다.
◆이준석은 21세기 김옥균? 료마?
신채호는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벌어진 일을 이렇게 소설로 썼다.
“박규수가 벽장 속의 지구의(地球儀)를 내어 한 번 돌리더니 김옥균에게 웃어 가로되, ‘오늘에 중국이 어데 있느냐, 저리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고 이리 돌리면 조선이 중국이 되어 어느 나라든지 중(中)으로 돌리면 중국이 되나니, 오늘에 어찌 정한 중국이 있느냐?’ 하더라. 김옥균,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닫고 무릎을 치고 일어났더라, 이 끝에 갑신정변이 폭발되었더라.”(지동설의 효력)
김옥균은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세계관의 전환을 경험했다. 그는 천재였고 뜻을 세우면 반드시 실천하는 혁명가였다. 하지만 전략가는 못 됐다. 박영효는 정변의 동지이자 리더였던 그에 대해 “문장력, 화술, 시, 글, 그림,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단점이라면, 덕(德)이 모자라고 모략이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김옥균형’ 혁명가는 일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불같은 의지를 소화시키지 못하고 세상에 대들다가 허망하게 죽은 요시다 쇼인과 수제자 4명이 그랬다. 근대의 변곡점에서 전(前)근대적 의리를 지키다 죽은 ‘라스트 사무라이' 사이고 다카모리, 근대를 앞당기려 정적을 제거하다가 암살당한 오쿠보 도시미치도 김옥균 스타일에 속한다. 그런데 이들만 있었다면 일본의 근대 역시 잘난 영웅들이 갈가리 찢어져 조선처럼 엉망진창이 됐을 것이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보기 드문 혁명가가 ‘료마형’ 영웅이다. 박훈 서울대 교수는 사카모토 료마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를 떠올리면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근엄하고 살벌한 메이지유신 시기에 드문 일이다. 그는 ‘난 일부러 죽으려고 해도 죽어지지 않는다’는 희대의 낙천가였다. 대단한 검객이면서도 암살이나 할복보다는 바다와 무역을 좋아했다. 막부를 미워하면서 무력 토벌보다는 협상과 타협을 선호했다. 삿초맹약은 그의 스타일이 만들어낸 걸작이다. 메이지유신이 그의 명랑함을 닮았더라면 근대 일본은 좀 더 세련됐을 것이다.”(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삿초맹약은 양대 웅번이던 사쓰마(가고시마)와 죠슈(야마구치)의 동맹을 말한다. 중재자 료마는 거창한 명분이 아니라 무기와 곡식을 거래하는 방식으로 두 웅번을 하나로 묶었다. 동맹 때문에 막부를 이기고 세대를 바꿀 수 있었다. 분산된 에너지를 하나로 모아 거대 에너지로 만든 것이다. 그렇다고 영화를 누리지도 못했다. 김옥균처럼 료마도 암살로 생을 마감했다. 31세였다. 조선 후기에도, 지금도 한국에 필요한 혁명가 유형이 이 ‘료마형’이다. 거대 야당을 이끄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요구받는 유형도 료마형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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