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20 23:03:48
“ 우리나라 영동지방은 큰 바다에 접해 있고 뭇 산이 모여 있어 경치가 특히 뛰어나고 기이하다. 맑고 그윽하고 깊은 곳이 도처에 널려있지만 그 중 아홉군은 경치가 더욱 뛰어나 관동팔경으로 불린다. 무신년 가을 찰방 김홍도와 김응환은 그림으로 당시에 이름이 났는데, 특별히 임금님의 명을 받들어 영동을 두루 다니며 산천을 그렸다. (중략) 아름답고 극히 우아하게 그려 세상의 교묘한 모습을 다 짜내었으니 모두 우리나라에 없었던 신필(神筆)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산천(山川)의 신령이 있으면 필시 그 모사가 너무 치밀하고 완벽하여 숨을데가 없음을 싫어할 것이라 한다.” - 서유구(徐有?)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이운지(怡雲志)」
단원 김홍도는 44세이던 1788년, 정조(正祖, 1752-1800)의 명을 받아 복헌 김응환(復軒 金應煥, 1742-1789)과 함께 금강산 및 관동팔경 지역을 순방하고 그 절경을 화폭에 담아 돌아왔다. 김홍도는 이때 그려 온 초본(草本)에 의거해 채색횡권본(彩色橫卷本)과 화첩본(畵帖本) 두 가지를 제작하여 정조에게 진상했다. 그러나 두루마리로 제작된 진채본(眞彩本) 작품은 화재(火災)로 소실되고 <해산첩(海山帖)>이라 불린 화첩은 소재를 파악할 수 없다. 현재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으로 불리는 화첩이 전하고 있는데, 이 화첩은 김홍도의 화풍상의 특징과 구도상 원형을 재현해놓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출품작은 <금강사군첩>에 실린 것과 같은 구도와 대등한 표현력, 묘사력을 지닌 것으로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닮아있어 같은 <해산첩>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김홍도의 금강산 사생은 후기의 개성적 산수화풍의 형성에 큰 계기가 되었으며 본 출품작은 <해산첩>의 원형을 짐작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이라 널리 알려진 작품의 명칭은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사(壺山外史)』에 나오는 ‘명사금강사군산수(命寫金剛四郡山水)’라는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대호정(帶湖亭)>
화면의 중앙을 유유히 흐르는 남강(南江)과 높은 언덕에 웅거하고 있는 대호정(帶湖亭)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누정(樓亭)은 선비들의 독서와 풍류의 공간으로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익히거나 벗과 노닐며 심신을 수양하는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지역을 대표하는 명승지로서 기능하기도 했다. 김홍도는 정조의 명에 따라 풍광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려 노력했기 때문에 누정이 화면의 중심에 위치하나 큰 비율을 차지하지 않는다. 진경(眞景)을 담아내기 위해 화면의 외곽에 이르기까지 정교하고 세련된 필치로 표현해 냈으며 <금강사군첩>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다. 치밀하게 담아낸 필선에 의해 회화 작품으로서의 운치가 약해지는 측면이 보이나 이는 어람용(御覽容) 작품의 고유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해금강 후면(海金剛 後面)>
해금강 유람의 백미인 후면의 경치를 표현한 것으로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바위들을 중심으로 파도와 이를 감상하기 위해 배를 타고 유람하는 인물을 그려냈다. 담백하고 세련된 색채와 함께 거친 암석을 표현하기 위해 다소 강한 필선을 사용했는데, 이와 대조적으로 수파묘(水波描)를 사용한 파도의 표현은 화면에 율동감을 더하며 부드러운 배경의 담채와 어우러져 자칫 강하게 느껴질 수 있는 작품을 극적인 분위기로 이끌어내고 있다. 암석의 하단부에 이르기까지 내리그은 필선으로 표현하여 괴량감이 느껴지며 이에 반해 소략하게 표현된 인물은 작지만 화면구성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시중대(侍中臺)>
시중대(侍中臺)는 관동십경의 하나로 관동팔경 중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며 또한 금강산 구역에서 가장 북쪽에 해당하는 곳이기도 하다. 시중호라는 호수를 끼고 있으며 높은 바위에서 내려다 보는 경관이 일품이라 옛부터 많은 사람들이 완상(玩賞) 하던 곳이다. 작품은 부감법(俯瞰法)을 사용하여 전체적인 풍광을 그려냈으며 이를 조망하는 효과를 잘 살려내고 있다. 근경에 담묵(淡墨)을 사용한 수목의 과감한 표현과 무심한 듯 얹어진 태점(苔點)이, 원경에는 멀리 해안선과 원산에 이르기까지 섬세한 필치로 가감 없이 묘사했다. 실경(實景)의 관찰에서 우러나온 넓은 공간감과 원근법에 따른 표현은 작품 전반에 안정감을 부여하고 있다.
참고문헌
오주석, 『단원 김홍도』, 열화당미술책방23, 열화당, 2004.
이태호, 『옛 화가들은 우리땅을 어떻게 그렸나』, 생각의 나무, 2010
진준현, 『단원 김홍도 연구』, 일지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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