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9 08: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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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騎士파’ 男女 화가 야블렌스키·베레프킨 愛憎의 일생
유럽으로 들어가는 항공의 관문이 프랑크푸르트지만, 정작 사람들은 이곳을 거쳐만 갈 뿐 이 부근을 여행하는 사람은 드물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주변 도시 중에 비스바덴이 있다. 바덴바덴과 쌍벽을 이루는 독일의 대표적 온천 도시인 비스바덴은 ‘… 온천’이라는 이름처럼 풍성한 숲으로 둘러싸였으며, 라인강과 마인강이 합류하는 아름다운 곳이다. 그래서 온천이 아니어도 휴식과 기분 전환을 위해 많은 사람이 찾는다.
비스바덴역에서 내려 중심 도로를 따라 시내로 들어간다. 도로 중간 오른편으로 육중한 건물이 나타나는데, 비스바덴 박물관이다. 도시 규모에 비해서 과도하게 거대한 박물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안으로 들어가면 건물의 장중함과 세련됨이 더욱 놀랍다. 그러나 그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예상외로 많은 뛰어난 회화 때문에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곳이다. 사실 이곳은 표현주의 회화 컬렉션에서 세계 최고의 양과 질을 자랑하는 곳이다. 그런데 여기의 많은 그림은 한 여성의 슬픈 일생과 닿아있다.
배신으로 끝난 러시아 남녀 화가의 동거
우리 이야기는 러시아로 날아간다. 마리안네 폰 베레프킨(Marianne von Werefkin·1860~1938)의 아버지는 제정 러시아군 총사령관이었다. 여성이 화가가 되기 쉽지 않았던 시대에 딸을 이해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아버지 밑에서 그녀는 행복하게 그림을 그렸다. 그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일리야 레핀의 클래스에서 사사하였다. 레핀이 그녀의 재능을 보고 '러시아의 렘브란트'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그런데 클래스에서 급우인 알렉세이 폰 야블렌스키(Alexej von Jawlensky· 1864~1941)를 만난 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4년 연하였던 야블렌스키는 무일푼 사관생도였다. 그녀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와 함께 뮌헨으로 달아나 함께 살았다. 그녀는 야블렌스키가 자신보다 화가 자질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연금 덕분에 생활에 지장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은 붓을 놓고 주부가 되어 야블렌스키를 뒷바라지했다. 부부가 되면 성(姓)이 바뀌어 연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마음만으로 지냈다. 두 사람은 뮌헨에서 칸딘스키와 뮌터 커플을 만났고, 네 사람은 표현주의의 대표적 유파인 '청기사파(Der Blaue Reiter)'를 창시하는 중심이 된다.
①마리안네 폰 베레프킨 ‘리투아니아의 도시’(1913년). 그녀는 러시아 출신이지만 리투아니아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②알렉세이 폰 야블렌스키 ‘자화상’(1912년). ‘청기사파’ 활동 당시 모습이다. ③마리안네 폰 베레프킨 ‘자화상’ (1910년). 베레프킨이 야블렌스키와 칸딘스키, 뮌터 등과 함께 ‘청기사파’를 결성하던 즈음에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나고 아버지의 연금은 끊긴다. 그녀의 생활은 궁핍해졌지만, 결코 그림을 팔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엽서와 삽화를 그려 야블렌스키를 부양하였다. 그런데 야블렌스키는 하녀와 관계를 맺고 그 사이에서 아들을 낳는다. 하지만 베레프킨과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결국 베레프킨은 야블렌스키와 헤어진다. 혼자가 된 그녀는 스위스 마조레 호숫가의 아스코나에 새로운 거처를 만든다. 호수는 안정을 되찾게 해주어 그녀는 다시 붓을 들어 새로운 회화를 시작한다. 그녀가 겪었던 파란만장한 일생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창의적인 회화 세계를 창조하였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내가 발견했다고 생각한 사람이 위대한 작품을 창조하도록, 그의 창녀가 되고 부엌데기가 되고 간호사가 되고 가정교사가 되었다. 대체 나는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나의 영혼은 나락에 떨어졌다…."
절망과 원망도 예술의 근원
베레프킨과 헤어진 야블렌스키는 비스바덴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그리고 아들을 낳은 하녀 헬렌과 결혼한다. 그리고 비스바덴에 20년간 거주하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다. 결국 그는 20세기의 뛰어난 표현주의 화가의 한 명으로 기록된다. 더불어 야블렌스키 덕분에 비스바덴은 예술 도시가 되고, 현대 예술의 대표적 ‘플럭서스(Fluxus)’ 운동도 비스바덴에서 시작되는 토양이 형성된다. 베레프킨은 1938년에 아스코나에서 홀로 생을 마감한다. 죽고 나서야 그녀는 그렇게 딸을 사랑했고 걱정했던 러시아의 아버지 곁에 묻혔다. 3년 후에 야블렌스키도 비스바덴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며, 비스바덴의 러시아 정교회 사원에 헬렌과 함께 묻혀 있다. 베레프킨의 그림들은 설명이 필요 없다. 강렬한 색채와 격한 형태는 보는 이의 가슴을 때린다. 그런데 그녀의 그림에서 야블렌스키와 겪었던 시련과 고통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녀의 그림에는 버려진 사람, 소외된 사람, 아픈 사람이 가득하다. 우리 주변의 불쌍한 사람들을 이토록 인상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그녀의 그림은 어떤 절규보다도 가슴 아프고 어떤 웅변보다도 통렬하다. 이것이 예술가의 소명이다. 1991년부터 비스바덴에서는 중요한 현대미술상인 ‘야블렌스키상’을 제정해, 5년마다 비스바덴 박물관에서 수상식을 연다. 지금 비스바덴 박물관에는 야블렌스키와 베레프킨의 작품 백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인생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결혼한 적도 없었고 배신과 실망으로 끝났지만, 지금도 두 사람은 늘 함께 거론된다. 두 사람의 그림은 여전히 비교되고 작품에서 상호 간 많은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헤어진 후로 20년이나 만나지 않았는데도, 두 사람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애증이 뒤섞인 두 예술혼이 되었다. 사랑뿐만 아니라 절망과 원망도 예술의 근원인 것이다. 올해에도 비스바덴 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기획전은 ‘야블렌스키-베레프킨 2인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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