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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김환기 작품관

김환기 1958년40호 Montagne Mountain

by 주해 2022. 11. 15.

2018-09-05 23:36:23

 

 

LITERATURE

 

Maroniebooks, Kim Whanki 김환기: 2012, p.147.Yoo Youngkuk Art Foundation, 한국 최초의 순수 화가동인 신사실파: 2008, p.131.Iljisa, 金煥基: 1975, p.85.

 

 

EXHIBITED

Whanki Museum, 신사실파 창립 60주년 기념전: 2007.11.9-2008.1.13.

 

작품설명

 

김환기의 본격적인 작품제작은 일본 유학시절부터로 1933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학원 미술부에 입학하여 정식 미술교육을 받으며 시작된다.

김환기가 미술교육을 받았던 1930년대 일본 미술계는 모더니즘을 주창하는 서구 유학 화가들의 영향으로 유럽 예술 사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받아들여져 다양한 화풍이 혼재했으며, 새로운 예술 운동의 수용에 있어 넓은 포용력을 보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김환기는 재학시절부터 전위적 미술단체인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와 백만회白蠻會에 참여했다. 유럽의 미술 조류들을 섭렵하고 돌아온 도고 세이지東鄕靑兒, 후지타 쓰구하루藤田嗣治 등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작가들이 만든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 참여하면서 이들로부터 서구의 미술 경향을 익혔고,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가 문을 닫자 백만회를 조직하여 새로운 미술양식을 추구했다.유학을 마칠 즈음 일본은 전시체제에 돌입하고 있었다.

김환기가 활발한 활동을 보이던 미술계에도 영향이 미쳐 군국주의적 사회분위기와 1920년대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에 대한 대치적 반응으로 아름다운 풍토와 성정을표현하기 위해 일본 고유의 표현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일본주의를기초로 한 서양화 제작 바람이 있었다. 이는 일본 화단이 서구 미술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음에 대한 반성과 그 맥을 같이 했다. 일본 미술계의 이 같은 움직임 속에 김환기는 이듬해 귀국하였는데, 자국 역시 동양주의가 형성되면서 ‘향토색鄕土色’이 주요 쟁점이었다. 향토색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조선을 표상하는 제재題材로 일본인 심사위원들이 권장한 것이었으나 전통 담론과 결부되어 자긍심 회복과 정체성 확립을 위한 한국미술의 주제의식을지배하는 가치로 규범화하였다. 김환기 역시 향토색이라는 난제를 고심할수밖에 없었다. 모더니즘을 기조로 한 향토색의 발현을 위해 김환기는 함축과 여운을 남길 수 있는 소재를 연구했고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대상을 찾아 우리 강산의 자연물과 전통기물 등을 탐닉했다. 작품 제작을 위해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던 예술가의 고심은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가가 되면서 더 늘어갔다.

미술대학교가 설립되고 온전히 한국에서미술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되자 교육가로서, 예술가로서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는 고유의 시각적 언어 획득과 세계화단의 인정이 절실했다. 이를위해 그는 대상을 끊임없이 고찰하여 화폭으로 옮겼으며,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파리와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교수직을 휴직하고 불혹을 훌쩍 넘기고서야 밟아 볼 수 있었던 파리는 젊은 시절의 김환기가 경험해보고 싶은 장소였다. 정식 미술교육을 받기 시작했던 1900년대 전반, 유럽은 세계미술의 중심이었고 내로라하는 거장들이프랑스 파리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유학했던 일본의 많은 화가들이‘구라파歐羅巴’로 통칭되던 유럽에서 직접 서구의 경향을 경험하고 체화하여활동하고 있었는데 한국의 화가들은 자국이 처한 상황에 묶여 일본 유학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야하는 것이 현실이었고, 김환기는 자신을포함한 예술가들이 여러 상황으로 인해 타국의 예술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을 최대 불행으로 여겼다.전란 속에서도 파리행을 생각했던 김환기가 실제로 파리에 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풍족했던 시절은 지나가고, 아낌없이 지불하고 가져 와 감상해 마지않던 고미술품들은 모두 조각나버렸으며, 그의 그림은 그가 예상한가치만큼 팔리지 않았다. 삶의 고달픔을 느끼면서 파리는 그 거리만큼 멀어졌다. 그럼에도 그의 파리행은 그를 예술가로 존중하고 아낌없이 내조를 펼쳤던 아내 김향안의 도움이 컸다. 구라파에 다녀오면 미술평론을 해보고 싶다며 종종 프랑스로 가자고 권했던 그녀는 김환기가 프랑스에 가보자고 하자바로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하며 적극적으로 준비했다. 김환기 보다 1년 먼저 파리로 건너가 화가 및 화상들과 교류했으며, 파리에 도착하여 작품을 제작함에 있어 무리가 없도록 집과 작업실을 마련했다. 아내로부터 준비가 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김환기는 신사실파 동인들의 후원으로 1956년 2월, 3일부터 8일까지 6일 동안 동화백화점 동화화랑에서 도불미전渡佛美展을 가진 후 5월, 파리에 정착했다.작업을 지속적으로 이어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준 아내 덕분에 김환기는 파리 정착 후 세 곳의 아틀리에에서 작품을 제작했다.

처음엔 룩상부르그 공원 근처의 아틀리에(아틀리에 뤼 닷사스Atelier Rue d’Assas)에서 작업하다가 생루이 섬의 아틀리에(생루이 아틀리에Atelier L’île Saint-Louis)로 옮겨 작업 했으며, 이후 한 번 더 아틀리에를 옮겨 뒤또 거리의 아틀리에(아틀리에 뤼 뒤또Atelier Rue Dutot)에서 마지막으로 창작 활동에 매진했다. 제작에 열심이었던 것만큼 작품 발표도 열심이었다. 파리에 도착한 해인 1956년 10월과이듬해 6월에 베네지트 화랑Galerie M. Bénézit에서 전시를 가졌고 몬테카를로와 니스, 브뤼셀 등지에서도 작품을 선보였으며, 1958년 3월에는 앵스티튀 화랑Galerie de l’Institut에서 전시를 개최하여 자신의 작품 세계를 적극적으로발표하는데 혼신의 열정을 기울였다.하루에 10시간에서 15시간을 작업하며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임했던 파리에서의 작품세계는 서울시기와 비교했을 때 급격한 변화를 보이지는 않는다. 기존의 기조를 이어나간 것으로 여겨지는 가장 주요한 이유는 소재의연속성이다.

그가 소중히 여겼던 한국적인 모티프가 파리의 화폭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한국의 화가들이 그 곳의 여러 경향을 받아들여 화풍이 변화했던 통상적인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파리에서 작품을 소개하면서 자기 자신을 찾고 우리 것을 돌아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던 김환기는 새롭고 다양한 미술문화에 흔들리지 않고 관조하며 탐색의 시기를 가졌고, 서울시기의 작업을 이어나가며 그 곳에서 익힌 세련된 조형과 색채 감각을 더했다. 이는 아마도 서양 미술의 흐름 속에서 휩쓸리지 않고 독창적이고 고유한 자기존재를 표출하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이러한노력은 소재의 확대와 푸른 주조색, 선묘의 활용으로 확인된다. 소재는 십장생과 같은 관념적 소재로까지 그 범위를 넓혔고, 푸른색의 사용을 통해 고국에 대한 상징성과 작가의 심성을 표현했으며, 선묘를 통한 대상의 응축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이후 시기의 작업들에서 그 맥이 이어지기 때문에 주목된다. 파리에서 다시 서울로 돌아온 김환기의 작업들을 살펴보면 구상의 형태는 점차 사라지고 추상의 선이 화면을 지배하기에 이르는데, 대상에서응축되어 나온 선은 뉴욕시기의 선과 점으로 이어져 김환기의 작업에 있어 중요한 맥을 잇기 때문이다.‘산’이라는 소재는 김환기에게 있어 항아리 못지않게 비중 있게 다루어진 소재이다. 파리로 가기 이전에도 제작되었고, 귀국 후에도 이어져 산을 소재로 한작품을 통해 그의 양식적 변모를 살펴 볼 수 있게 한다. 이전의 작품들이 면적구성을 보여준 것에 반해 파리시기 중반을 넘기면서부터는 대상의 본질을 꿰뚫고 핵심을 응축하여 표현하기 위해 대상의 형태와 양감, 공간과 색채를 제한한 채 ‘선線’을 통한 화면의 구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선은 오래 전부터 김환기가 추구한 중요한 조형요소로 파리시기에 와서 본격적으로 화면을 점유했다. 파리에 오기 전의 산은 산 이외의 자연물과 한데 구사되었으나 파리에 머물면서는 점차 정리되어 산세의 흐름을 추상화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실재하는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의 화면 속에서 중첩된 산의 봉우리는 겹쳐진 선이 되고, 깊은 골짜기는 단선을 중첩시켜 표현하며 기호화된 화면을 구성했다.

선의 사용을 통한 관념적이고 추상화된 산으로의 변모는 파리시기 김환기의 작업을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서양의 물감으로 그린 동양의 산수화 같은 김환기의 산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그가 파리에서의 가진 첫 번째 개인전과 마지막 개인전의 포스터 삽입 작품으로 선택 되어졌다. 첫 번째 개인전은 서울에서 제작해 온 작품으로 포스터를제작하였으나, 마지막 개인전의 포스터는 1958년에 제작한 작품으로 제작했다. 세계미술의 중심에서 자신의 전시를 대표하는 포스터에 산을 소재로 한 작품을 선택한 것은 한국의 화가로서의 미감을 서구에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1958년에 제작된 출품작 은 산의 모습을 40호 화면 가득 묘사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산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캔버스의 일부분에 공간을 할애하여 여백을 두었던 것에 반해 출품작은 화면 전체를 소재에 내어주어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별도로 여백을 고려하지는 않았지만 주조색과 선의 사용을 치밀하게 조율하여 시각의 순환을 이끌어냈고, 산의 중첩에 따른 색 변화와 산세에 따른 굵기의 변화는 평면에 구현된 이미지이지만 입체감을 갖게 한다.

산을 소재로 한 작품은 달과 함께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상단에는 산을, 하단에는 달을 각각 배치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산봉우리에 달을 걸쳐 묘사하는경우도 있다. 출품작에서 달은 제일 사납게 솟아 오른 산세에 둥글게 떠 있다.

산세를 따라 흐르는 물줄기는 달빛을 머금어 황금빛으로 낙하하다 능선을 넘으며 찬란하게 부서져 내린다.

산을 소재로 선적 구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출품작이 제작되던 해인 1958년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으며, 출품작과 유사한 형태로 제작된 작품 <산월>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Atelier Rue d’Assas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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