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21 21:16:06
1963년 10월, 제7회 상파울루비엔날레Bienal de São Paulo 참가 후귀국길에 잠시 미국에 들러 미술계의 흐름을 느끼고자 했던김환기는 이내 정착을 결정하고 뉴욕에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그러나 50대에 접어든 나이에 이국의 낯선 환경 속에서 미술계의흐름을 인지하고 체화體化하는 것은 녹록치 않았다. 당시 추상미술의거점이 뉴욕이었기에 미국에서의 창작활동을 고려했었지만 파리에서머물며 창작활동에 전념했던 시기처럼 만반의 준비를 하여정착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든든한 조력자인 아내 없이 먼저 혈혈단신으로 뉴욕에 발을디딘 것은 미술계 흐름의 변화가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어 준비등으로 지체할 수 없음을 직감했고, 한편으론 록펠러 3세 재단의지원을 염두 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록펠러 3세 재단JDR 3rd Fund은아시아와 미국 간의 문화교류를 촉진시키기 위하여 기금을 설정하고미국 내에서 제작·연구하는 예술가를 지원한다고 발표했는데,비엔날레 참가 전 신청을 마친 상태라 오래지않아 지원을 받고아틀리에를 마련하여 작업할 수 있었다.
교직 생활을 겸했던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작품을 판매를 해야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는데,정착 초반에 가진 개인전에서 한 기자의 혹평으로 인해 작품이판매로까지 이어지지 못했던 일과 1966년 타스카 화랑 전시에서판매 작품의 대금을 지급 받지 못하고 미판매 작품도 돌려받지 못한 일로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 때문에 1968년경까지선뜻 재료 구입에 나설 수 없어 2년 뒤 봄 즈음 귀국까지 마음에두고 있었다. 생활고로 이 시기에는 캔버스 작품에 비해 종이작품의 수가 많은 편이다. 뉴욕타임즈 신문지 위에 유화작업을하거나 콜라주 작업, 파피에 마셰로 오브제를 만드는 등작업을 쉬지 않았다.
그 중 종이 작품과 캔버스 작품의 구성과 채색에 있어 유사성을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재료 구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작가가 종이 작업 후 일련의 작업을선택하여 다시금 캔버스로 옮겨 완성한 것이다. 출품작 역시유사성을 보이는 신문지에 유채 작품이 확인된다. 종이 작품은2월 28일에 제작되었으며, 캔버스 작품은 이로부터 12일 후인3월 12일에 작업을 시작했다. 출품작은 화면을 비율에 차등을두고 세 개의 공간으로 구분하여 위와 아래는 어둡게 처리하고중앙은 회청색으로 처리했다. 면과 면이 만나는 부근에파란색, 붉은색, 푸른색의 색점을 나열하여 고요함 속에 운율을부여하고 중앙에는 원형으로 색점을 크게 그려 넣어 기본조형을 기반으로 한 균형미를 보여준다.
이 시기 김환기는기본 조형요소인 점과 선, 면에 대해 고찰하면서 선보다는 점이개성적인 것 같다며 점을 주된 모티프로 다양한 작업을 시도했는데, 출품작 역시 점이 주된 역할을 하고 있으면서도 화면안에서 균형과 운율, 조형성을 갖추고 있어 작가의 다양한시도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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