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 박생광(朴生光 : 1904~1985) : 열반(涅槃:Nirvana) : ink and color on paper : 136.3☓136.0cm : 1982
by 주해2022. 12. 2.
2020-12-11 22:56:09
LITERATURE
탄생 100주년 기념 박생광(이영미술관, 2004), p.183.Park Saeng Kwang(이영미술관, 2004), p.41.朴生光畵集(도서출판등불, 1986), pp.212-213.
작품설명
박생광의 예술에서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당신은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화를 배우고, 또 일본 원전院展에서 회원으로 대접받고 활동했는데 어떤 계기로 그렇게 민족적인 것으로 전환 하였느냐는 점이다. 더욱이 어떻게 순식간에 일본식 채색법을 버리고 이때까지 우리 한국화가들이 외면했던 단청을 비롯한 민족적 채색을 추구하게 되었고 그 내용도 무속, 불교, 십장생 역사 속에서 찾게 되었느냐는 것이었다.이 점에 대해 대개는 불교에 심취하면서 일어난 변화로 보고 있다. 당신이 말한 바 “마음을 인도에서 보고”라는 대목과 그와 진주농고 동창이기도 한 청담스님의 영향으로 일단 해석하곤 하는 것이다.그러나 내가 아는 한 박생광 화백은 결코 불교에 심취한 분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우리 고유의 전통과 역사에 더 심취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역사화를 즐겨 그리고 십장생, 조선 여인, 무당, 장승 등을 많이 그린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박생광에게 불교란 우리 역사의 일부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넓게는 동양의 사상으로서 불교였다.마찬가지로 그에게 있어서 일본화란 동양의 채색화 중 하나였다. 그래서 동양화의 현대적 표현 매체로서 일본에서 개발한 석채를 별 거리낌 없이 사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 활동할 때는 민족적 색채 감각보다는 동양적 색감에 신경을 더 써 왔는데 1977년 완전 귀국 후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작업을 하다 보니 우리의색감을 개발해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필요성을 절실하게 갖게 된 것이다. – 유홍준「그대로 박생광 화백의 삶과 예술에 대한 회상」, 『박생광』(갤러리 현대, 박생광 기념 사업회, 2004), p.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