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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한국 고미술

수연도 壽宴圖 : color on silk (655.0☓183.0cm) (twelve-panel screen)

by 주해 2022. 11. 30.

2020-09-15 16:26:36

 

 

작품설명

총 열두 폭에 달하는 화폭에 잔치 장면인 듯 분주한 사대가의 풍경을 담은 수연도이다. 광폭 중에서도 유달리 큰 크기에 해당하며, 수연도라 이름 붙였으나 도상적 유사성으로 보아 곽자의축수도 郭子儀祝壽圖 , 즉 곽분양행락도 郭汾陽行樂圖 의 이른 시기 작품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전각의 구조, 정원의 형태, 각 인물 군의 장면 등이 그러한데, 다만 조선시대 곽분양행락도와는 몇 가지 차이를 보며 중국 작품으로 추정된다.국내에 전하는 곽분양행락도는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 약 40여 점에 해당하며, 중국에서 곽자의축수도, 곽자의상수도 郭子儀上壽圖 , 곽자의축수고사도 郭子儀祝壽故事圖 등 다양한 제목으로 불리는데 비해 한국에서는‘행락’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또한 병풍의 형태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 명말 청초부터 근대까지,조선에서는 숙종시기부터로 볼 수 있다.題郭汾陽行樂圖功業蒐 福祿來 絲管高堂列 子壻華筵倍 漢唐無與汾陽比 主不爲疑衆不 猜곽분양행락도에 제함.공업이 쌓이니 복록이 왔도다. 거문고와 피리꾼이 높은 건물 앞에 열 지어 있고 아들과 사위들이 화려한 연석에서 모시고 있구나 한당에 분양과 비교될 이 없으니 임금도 의심치 않았고 대중도 시기하지 않았네.題郭子儀行樂圖賜世子古來完福郭爲先 子壻諸孫盡在前 圖與此障非偶爾 佇看多社又多 年세자에게 내린 곽분양행락도에 제함.예부터 만복을 갖춘 이로는 곽자의를 제일로 여기느니, 아들, 사위, 손자들이 모두 앞에 섰구나. 이 같은 그림이 우연히 그려진 것은 아니니, 곁에 두고 보면서 만복과 장수를 누리라.위 글은 『열성어제 列聖御製 』에 실린 숙종의 제시 두 편으로, 현재 해당하는 작품을 찾을 수는 없으나 복록과 장수의 의미로 곽분양행락도를 하사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곽분양행락도는 곽자의의 초상을 제작하고 사당을 짓는 등 전쟁에서의 영웅적 면모를 부각시키던 초기와 달리 명말을 거치며, 또 그의 영향을 받은조선후기에는 만복과 다산, 만수무강의 상징으로써 병풍의 형태로 유행했다. 그리고 이는 근대기 민가로까지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그렇다면 앞서 언급했듯이 중국과 조선 작품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우선 곽자의 부부 도상에서의 가장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부부의 모습은 곽자의만 그려진 예, 함께 등장하지만 각기 배치된 예, 나란히앉은 예 등 다양하게 그려졌다. 중국에서는 부부가 중심 건물에 동석한 경우가 다수라면, 조선에서는 곽자의는 1층에, 부인은 옆 전각의 2층에 분리되어 그림의 중심부를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국내에서는 한양대학교박물관 소장 《영고도병 英故圖屛 》이 부부가 한 전각 내 그려진 유일한 예라고 할수 있겠다. 출품작에는 명말 청초 시기 작품들과 같이 부부가 나란히 서 연회에 방문한 자손 및 손님이 전하는 축하와 선물을 받는 모습이 그려졌다. 또한 담장 내 중심 건물을 높고 크게 그려 화면의 중심부를 잡아줬으며, 많은 이들의 존경과 신임을 받는 곽자의 부부를 중심 도상으로 놓았다. 반면 조선의 도상에서는주변부의 다양한 풍경을 부각시켜 시선을 분산시킬 뿐 아니라 곽자의 역시 권위적인 모습보다는 손주들과놀아주며 자손번영에 초점을 맞춘 예가 더 많다. 실제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곽분양행락도와 백자도가혼합된 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형태 면에 있어서도 조선에서는 8폭 내지 10폭이 대부분이라면 중국에서는 주로 12폭으로 제작된 작품이많다. 또한 그림보다는 칠기병 漆器屛 등 장식적 공예품의 예가 많아 출품작과 같이 비단에 그려진 경우는매우 희귀하다고 할 수 있다.이밖에 자로 대고 그린 듯 정확한 대각선 구도의 전각의 형태에서는 계화의 내력이, 하얀 얼굴에 가느다란눈, 자그마한 이목구비에, 여러 겹의 화려하게 늘어지는 복식의 여인들의 모습에서는 사녀도의 전통이 고스란하며, 정원 내 가득한 수목과 학과 노루와 같은 영물들에선 꼼꼼한 채색 공필화법이 느껴진다. 인물은연주로 흥을 돋우는 악무와 담장 밖에서 대기 중인 하인들까지 포함해 총 104명이 등장하며, 수석과 고배등 각기 진귀한 기물을 든 모습이 흥미롭다. 또한 손님들이 타고 온 말의 모습에서는 북송대 말 그림에 능했던 사대부 화가 이공린 李公麟 의 필법도 느껴져 중국 내 다양한 전통 화법의 총 집합체로 볼 수 있겠다. 두폭씩 따로 분리되어 보관해온 탓에 폭마다 조금씩 이색지지만 고급 안료로 정성 들여 칠한 색상이 잘 남아 있으며 묘사 솜씨와 그 크기로 보아 궁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참고문헌정영미, 「조선 후기 곽분양행락도 연구」(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9)이홍주, 「조선시대 宮中 彩色人物畵에 보이는 중국 元體 人物畵의 영향」(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김홍남, 「중국 〈郭子儀祝壽圖〉 연구-연원과 발전」(『미술사논단』 33, 한국미술연구소, 2011), pp.165-202.김홍남, 「한국 〈郭汾陽行樂圖〉 연구」(『미술사논단』 34, 한국미술연구소, 2012), pp.67-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