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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미술/서양 미술사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편지를 읽는 여인(1662~1663년경) /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by 주해 2022. 12. 12.

2021-09-04 12:05:52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1/09/04/LYCWTGMZZJBI3NSG2LNUJ7M7MU/

 

[아무튼, 주말] 편지는 언어로 만든 집을 공유하는 것

아무튼, 주말 편지는 언어로 만든 집을 공유하는 것 김영민의 문장 속을 거닐다 고대 로마 문장가 키케로의 편지 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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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문장가 키케로의 편지
“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편지를 읽는 여인(1662~1663년경)'.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 무엇보다 건강에 유의하기 바랍니다. 당신이 심한 열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말과 글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카이사르의 편지에 대해 그토록 신속하게 알려주어서 고맙습니다. 필요한 일이 생기거나 상황이 진전되면 앞으로도 알려주기 바랍니다. 건강에 유의하기 바랍니다. 안녕. 6월 2일에 보내요.”

이것은 로마의 문장가 키케로가 사랑하는 아내 테렌티아에게 보낸 많은 편지 중 하나다. 첫머리에 나오는 “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Si vales bene(est, ego) valeo·시 발레스 베네, 발레오)”라는 문장은 로마인들이 편지 쓸 때 사용한 관용적인 표현이다. 키케로는 특히 사랑하는 아내에게 편지를 보낼 때 저 문장을 사용하기 즐겼다. 로마는 망하고 키케로는 죽었지만, 저 문장은 살아남아 이렇게 오늘날까지 전한다.

언론학자 정은령은 바로 저 문장을 받아 자신의 산문집 제목으로 삼았다. 부스러지기 쉬운 삶의 경험들에 온기를 가지고 다가가고자 한 산문정신에 어울리는 제목이다. 일단 안부를 물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따뜻하지 않은가.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거기에 있다. 누군가 거기에 있기에 안부 편지를 쓸 수 있는 것이다. 편지를 쓸 수 있다는 사실 자체도 놀랍다. 타인과 소통 수단을 공유하고 있다는 말이니까. 언어로 만들어진 의미의 집을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안부를 묻는 것은 사실을 통보하는 것보다 따뜻하다. 자기 용건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안부가 궁금해서 보내는 것이니 따뜻하다. 늘 자기에게 필요한 용건이 있을 때만 연락해 오는 이들은 얼마나 차가운가. 인간이라면 누구도 타인의 도구나 자원에 불과한 존재로 취급받고 싶지 않을 것이다.

빈첸초 포파의 '책을 읽는 어린 키케로(1480년대)'./ The Wallace Collection

인간이 인간에게 안부를 묻는 방식은 다양하다. 그냥, “안녕하세요”라고 상대의 안부를 확인할 수도 있다. “별일 없지?”라고 상태를 점검할 수도 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당신은요?” 혹은 “잘 지내고 계시죠, 저는 요즘 그렇지 못해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 많은 방식을 포기하고, 기어이 “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라틴어의 전적에서 보물을 찾아내어 말한 것이다.

“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 이는 당신이 안녕하기만 하면 나도 안녕하다는 말이니, 상대가 나에게 미치는 엄청난 영향을 인정하는 것이다. 영향은 권력이 내뿜는 입 냄새 같은 것.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권력자의 입 앞에 노출된 약자처럼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당신과 나는 자존심을 다투는 관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타인의 안녕 여부가 나의 안녕을 좌우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상대의 상태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 공감의 정도가 높은 나머지, 상대가 잘 있지 못하면 나도 잘 있지 못하게 되어 버린다. 다시 말해, 당신과 나는 한 몸이다. 하나의 몸인데도 공감이 안 되는 상태를 옛사람들은 불인(不仁)이라고 불렀다. 한의사들이 ‘불인’이라고 하면, 그것은 몸이 마비되었다는 말이다. 자기 몸 하나도 마비되기 십상인데, 타인의 몸 상태를 자기 몸 상태처럼 감각하다니.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까.

사람은 그런 대단한 경험을 한다. 초등학교 시절 정은령은 약국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다가 길가의 한 여자 아이를 목격한다. 그리고 그 기억을 중년이 되어서도 놓지 못한다. 아이가 들고 가던 종이봉투의 밑이 빠지고, 터진 봉투에서 하얀 쌀이 쏟아져 내린다. 당황한 아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그 사태가 어떻게 수습되었는지 중년의 정은령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광경을 목격한 자신의 어린 가슴이 가빠지고, 누가 좀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자기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음을 아직도 기억한다. 놀람과 슬픔과 부끄러움이 범벅이 된 유년 시절의 그 한순간을 아직도 놓지 못한다. 그리고 말한다. “목격자가 된다는 것은 도망칠 수 없다는 뜻이다. 무서운 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아무리 달려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 꿈처럼, 나는 내가 목격한 것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 침묵을 지키며 보지 않은 척한다 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해도, 무엇인가를 본 이후는 그 이전과 같지 않다.”

자신이 가장 많이 목격하고, 목격할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라는 말은 타인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자신에게 보내는 안부 인사가 될 수 있다. 편지 속의 ‘당신’은 이제는 타인처럼 느껴지는 과거의 나일 수도, 미래의 나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과거의 자신이 안녕하기만 하다면 현재의 자신도 안녕할 거라고, 미래의 자신이 안녕하기만 하다면 고생 중인 현재의 나도 안녕할 거라고 위안을 건넬 수 있다. 그리하여 과거 현재 미래에 흩어져 있는 그 많은 ‘나’들은 모여 한 몸이 된다. 현재의 자신을 돌보는 일이 미래의 자신을 돌보는 일이 된다. 오늘 미룬 일은 미래의 자신에게 미룬 것이다. 오늘 해낸 일은 미래의 자신에게 선물한 휴식이 된다.

자기 몸이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공감하는 타인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자중자애(自重自愛)의 일이 자기 일신에 국한되는 일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관계있는 공적인 일이 된다. 그리하여, 사적 자아는 작을지라도 공적 자아는 계속 확대될 수 있다. 북송(北宋) 시대의 사상가 장재(張載)는 <서명(西銘)>이라는 글에서 “백성은 나의 동포이다(民吾同胞·민오동포)”라고까지 말했다. 이 얼마나 영웅적인 자아관이란 말인가. 그러나 실천은 쉽지 않다. 아내에게 “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라고 편지를 쓰던 키케로는 결국 아내 테렌티아와 이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