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13 23:39:40
속세를 떠나 매화와 학을 벗 삼아 깨끗한 삶을 추구했던 북송대 임포선생의 모습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서호방학도이다.
종폭의 화면에 풍성하게 피어난 매화를 근, 중, 원경에 고루 배치하고 대부분의 공간을 여백으로 두어 안개어린 서호의 정경을 아련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매화꽃에 얹은 호분과 인물의 얼굴, 두루미의 묘사에 채색을 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묵조로 담담하게 처리해 고요한 산골의 시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출품작은 간송미술관에 소장중인 서호방학도와 동일한 소재를 갖추고 있으며 화면의 규모나 구성에 있어 흡사한 면모를 보인다.
다만 인물의 동태나 방향성에 있어 차이를 보이는데, 간송 소장작이 시동과 함께 멀리 떠오른 학을 바라보는 모습이라면 위 작품은 임포선생이 두루미를 막 날린 후 매화가지에 손을 걸쳐 놓은 모습이라는 것이 그 차이점이라 할 수 있겠다.
위 작품은 일제 강점기 ‘경성구락부 미술경매-부내 박창훈 박사 소장품 매립전’에서 경매가 되었던 이력이 있다. 당시 도록에 실린 모습과 보존 상태는 거의 일치하며 요결부위에 심을 넣어 장황하는 일본식 표구형태로 보아 일본인이 구입해 장황해 놓았던 것을 국내 소장자가 다시 구입해 고국으로 가지고 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대 유명 수장가 중 한명이던 박창훈 박사의 구장품이었던 점과 위창 오세창, 송은 이병직의 제題가 적혀있다는 점에서 당대 최고 수장가들의 이목을 끌던 귀한 작품이었 음을 스스로 우리에게 알리고 있다.
박씨가 혜안과 온축과 욕심과 희생을 성경盛傾하여 엄선에 경가정선更加精
選하며 수집하신 서화와 골동이라는 것은 필자 뿐아니라 이는 다 아는 바
다. 그이가 십 여년 이래로 고인 유적 수집에 자수自手로 고심한 것은 친근
자親近者로서 경탄치 아니할 수 없었다. 박씨가 금번 매립한 근삼백점은 그
야말로 립립개신고粒粒皆辛苦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성의와 열심 그 위에 선인을 추공존숭追恭尊崇하는 거룩한 마음으로 구득求得한 미술품을 전부 출방치 않으면 안될 사정이 나변奈邊에 있는가. 그러면 그 진의가 어디 있는가. 우리는 매우 궁금하였고 속으로 박씨를 책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 1940년 5월 1일자. 3면 부분 中
서호방학도는 우리민족의 어렵던 시기, 경매로 나와 일본인의 손에 들려 고국을 떠났다가 굴지의 수장가들로 하여금 다시 돌아오게 되는 수난을 겪었다.
이는 당시 박창훈 박사의 대단위 매립을 안타까워한 동아일보 오봉빈 선생의 논고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바, 당시 일본인 소장자도 단원의 명성과 화격을 알고 있음에 최고의 장황을 했겠지만 그래도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한 수장가들이 있었기에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단원의 유산을 감상할 수 있는 지금이 있지 않았나 싶다.
최고의 화원으로서 후대에 미학적 울림을 전하는 천재화가 단원의 서호방학도. 우리 문화재로서 다시는 부침이 없어야할 소중한 김홍도의 유산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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