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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김환기 작품관

김환기(1913~1974) - 1957년 - 80호 - oil on canvas - 항아리

by 주해 2022. 11. 17.

2019-02-28 13:15:06

 

 

LITERATURE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Whanki A Pioneer of Korean Modern Art: 2017, pp.118-119.

Maroniebooks, Kim Whanki 김환기: 2012, cover page, p.121.

Gallery Hyundai, 김환기 25주기 추모전: 1999, p31.

Whanki Museum, 김환기 25주기 추모전 백자송白磁頌: 1999, p.47.

Samsung Culture Foundation, 한국의 미술가 김환기: 1997, p.82.

Whanki Museum, 김환기선생 탄생80년 기념전 영원의노래: 1993, p.75.

Kumsung Publishing, 韓國近代繪畵選集 5: 1990, p.92, pl.17.

Iljisa, 樹話 金煥基 畫集: 1984, pl.28.

Korea Britannica Corporation, 김환기: 1980, pl.31.

Junghan Publishing, 韓國現代美術全集 10: 1980, pl.11.

 

 

EXHIBITED

Seoul, Gallery Hyundai,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김환기: 2012.1.6-2.26.

 

 

작품설명

“ 화가로서만이 아니라, 교육자, 미술행정가로서 한국미술계를 이끄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던김환기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예술의 현 위치를 알고 싶다는 생각에서 1956년 현대미술의메카 파리로 떠난다.

파리에서 머무는 4년간 그는 새로운 예술, 세계적인 예술로 나가기 위해 서는먼저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고 근본으로 돌아가야 함을 깨닫는다. 김환기는 예술의 본질에 다가가기위해 선택한 화제畫題인 고국의 자연, 고향마당의 향기 뿜던 매화가지 사이로 둥실 떠오른 보름달,고향 바다와 하늘의 쪽빛, 백자의 선線과 목가구의 면面 구성을 자연의 모습 그대로 간직하되 서구의미술이 한창 매진하고 있던 상징과 추상의 기법을 차용해 화면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단색조의 바탕 위에 자연의 원형으로서의 산, 달, 강 그리고 새나 사슴 등의 생명체를 구현하는데,이때 자주 사용되던 청색계열의 빛깔들은 만물이 생성하는 기원, 생명력의 장場의 상징으로 이해되곤 한다.

또한 작품 안에서 상상적인 추상공간과 도자기 같은 실제 형태가 공존하며 색色과 면面의 성격이 선線에 의해 재구성되기도 한다. 사물이나 자연이라는 구체적인 소재를 택하면서도 화면질서의 내적 자율성에 의지하는 추상의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김환기의 표현처럼, ‘여기 와서 느낀 것은 시時 정신이오. 예술에는 노래가 담겨야 할 것 같소.’라는 시정신詩精神의 구현을 의미한다.”- 『김환기탄생100주년 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Whanki Museum樹話 金煥基1913년, 전라남도 신안군 기좌도(現 안좌도)에서 부농 김상현의 1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난 김환기는유복하게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친이 백두산의 홍솔을 높은 산들이 바다와 맞닿아 있는 남단의 섬까지 운반해 집을 지었다는 일화부터 서울과 일본 유학 등 부족함 없는 여건이었다.

그러나 그의 젊은 시절은 혼란의 시기였다. 출생 8년 전인 1905년에는 한일 협약을사늑약乙巳條約이, 3년 전인 1910년에는 한일 병합경술국치庚戌國恥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진행되어 망국의 설움에 좌절하고 분노하며 방황했기 때문이다. 그가 출생하고 자라 성년이 되고도 한참 후인 1945년에 광복을 맞기까지의 일제강점기는 교육과 문화 등에 있어 정책적으로 우리 고유의 가치관과 전통이 억압당했다. 자유를 되찾고 후일을 도모하던 1950년에는 내전이 일어나 피난길에 올라야 했고, 1953년 휴전 협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서로를 겨누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성장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젊은 나날, 김환기는 역사의 변혁기를 예술가로 서 헤쳐 왔다. 풍파가 사그라지기를 기다린 세월, 불혹에 접어든 중견 화가의 예술적 사명감은 무엇이었을까.

김환기의 본격적인 작품제작은 일본 유학시절부터로 1933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학원 미술부에입학하여 정식 미술교육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김환기가 미술교육을 받았던 1930년대 일본 미술계는모더니즘을 주창하는 서구 유학 화가들의 영향으로 유럽 예술 사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받아들여져다양한 화풍이 혼재했으며, 새로운 예술 운동의 수용에 있어 넓은 포용력을 보였다.

이러한 분위기속에 김환기는 재학시절부터 전위적 미술단체인 아방가르드 양화 연구소와 백만회白蠻會에 참여했다.유럽의 미술 조류들을 섭렵하고 돌아온 도고 세이지東鄕靑兒, 후지타 쓰구하루藤田嗣治 등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작가들이 만든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 참여하면서 이들로부터 서구의 미술 경향을 익혔고,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가 문을 닫자 백만회를 조직하여 새로운 미술양식을 추구했다.유학을 마칠 즈음 일본은 전시체제에 돌입하고 있었다. 김환기가 활발한 활동을 보이던 미술계에도 영향이  미쳐 군국주의적 사회분위기와 1920년대 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에 대한 대치적 반응으로 아름다운 풍토와  성정을 표현하기 위해 일본 고유의 표현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일본주의를 기초로 한 서양화 제작  바람이 있었다.

이는 일본 화단이 서구 미술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음에 대한 반성과 그 맥을 같이 했다.일본 미술계의 이 같은 움직임 속에 김환기는 이듬해 귀국하였는데, 자국 역시 동양주의가 형성되면서 ‘향토색鄕土色’이 주요 쟁점이었다. 향토색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조선을 표상하는 제재題材로 일본인 심사위원들이 권장한 것이었으나 전통 담론과 결부되어 자긍심 회복과 정체성 확립을 위한 한국미술의 주제의식을 지배하는 가치로 규범화하였다. 김환기 역시 향토색이라는 난제를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모더니즘을 기조로 한 향토색의 발현을 위해 김환기는 함축과 여운을 남길 수 있는 소재를 연구했고한국적인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대상을 찾아 우리 강산의 자연물과 전통기물 등을 탐닉했다.

작품 제작을 위해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던 예술가의 고심은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가가 되면서더 늘어갔다. 미술대학교가 설립되고 온전히 한국에서 미술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되자 교육가로서, 예술가로서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는 고유의 시각적 언어 획득과 세계화단의 인정이 절실했다.이를 위해 그는 대상을 끊임없이 고찰하여 화폭으로 옮겼으며,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파리와 뉴욕행비행기에 몸을 실었다.Paris, 1956-1959김환기의 작품 구분은 제작 시기와 장소를 따라 동경시기(일본/유학시기), 서울시기Ⅰ, 파리시기,서울시기Ⅱ, 뉴욕시기로 구분된다. 출품작을 제작한 1957년은 여러 시기 중 그가 프랑스 파리에머물며 작품을 제작했던 시기로, 파리시기는 1956년부터 1959년까지 약 4년의 기간이 해당된다.교수직을 휴직하고 불혹을 훌쩍 넘기고서야 밟아 볼 수 있었던 파리는 젊은 시절의 김환기가 경험해보고 싶은 장소였다. 정식 미술교육을 받기 시작했던 20세기 전반, 유럽은 세계미술의 중심이었고 내로라하는 장들이 프랑스 파리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유학했던 일본의 많은 화가 들이 ‘구라파歐羅巴’로 통칭되던 유럽에서 직접 서구의 경향을 경험하고 체화하여 활동하고 있었는데, 한국의 화가들은 자국이 처한 상황에 묶여 일본 유학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야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전란 속에서도 파리행을 생각했던 김환기가 실제로 파리에 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그의 파리행은 그를 예술가로 존중하고 아낌없이 내조를 펼쳤던 아내 김향안의 도움이 컸다. 김환기 보다 1년 먼저 파리로 건너가 화가 및 화상들과 교류했으며, 파리에 도착하여 작품을 제작함에 있어 무리가 없도록 집과 작업실을 마련했다. 아내로부터 준비가 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김환기는 신사실파 동인들의 후원으로 1956년 2월, 3일부터 8일까지 6일 동안 동화백화점 동화화랑에서 도불전을 가진 후 5월, 파리에 정착했다.작업을 지속적으로 이어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준 아내 덕분에 김환기는 파리 정착 후 세 곳의아틀리에에서 작품을 제작했다. 처음엔 룩상부르그 공원 근처의 아틀리에Atelier Rue d’Assas에서작업하다가 생루이 섬의 아틀리에 Atelier L’île Saint-Louis로 옮겨 작업 했으며, 이후 한 번 더 아틀리에를 옮겨 뒤또 거리의 아틀리에Atelier Rue Dutot에서 마지막으로 창작 활동에 매진했다. 제작에 열심이었던 것  만큼 작품 발표도 열심이었다. 파리 체류 중에 총 다섯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파리에 도착한 해인 1956년 10월과 이듬해 6월에 베네지트 화랑에서 전시를 가졌고 몬테카를로와 니스, 브뤼셀 등지에서도 작품을 선보였으며, 1958년 3월에는 앵스티튀 화랑에서 전시를 개최하여 자신의 작품 세계를 적극적으로 발표하는  데 혼신의 열정을 기울였다.

하루에 10시간에서 15시간을 작업하며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임했던 파리에서의 작품세계는 서울시기와 비교했을 때 급격한 변화를 보이지는 않는다. 기존의 기조를 이어나간 것으로 여겨지는 가장 주요한 이유는  소재의 연속성이다. 그가 소중히 여겼던 한국적인 모티프가 파리의 화폭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파리에서 작품을 소개하면서 자기 자신을 찾고 우리것을 돌아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던 김환기는  새롭고 다양한 미술문화에 흔들리지 않고 관조하며 탐색의 시기를 가졌고, 서울시기의 작업을 이어나가며  그 곳에서 익힌 세련된 조형과 색채 감각을 더했다. 이는 아마도 서양 미술의 흐름 속에서 휩쓸리지 않고 독창적이고 고유한 자기존재를 표출하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소재의 확대와 푸른 주조색, 선묘의 활용으로 확인된다. 소재는 십장생과 같은 관념적 소재로까지 그 범위를 넓혔고, 푸른색의 사용을 통해 고국에 대한 상징성과 작가의 심성을 표현했으며, 선묘 통한 대상의 응축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이후 시기의 작업들에서 그 맥이 이어지기 때문에 주목된다.“ 나는 동양 사람이요, 한국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비약하고 변모하더라도 내 이상의 것을 할 수가 없다.내 그림은 동양 사람의 그림이요, 철두철미 한국 사람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이려면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이란 강렬한 민족의 노래인것 같다.

나는 우리나라를 떠나 봄으로써 더 많은 우리나라를 알았고, 그것을 표현했으며 또 생각했다. 파리라는 국제경기장에 나서니,우리 하늘이 역력히 보였고, 우리의 노래가 강력히 들려왔다. 우리들은 우리의 것을 들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 것이 아닌 그것은 틀림없이 모방 아니면 복사複寫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김환기, 「片片想 8」, 『김환기 에세이-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Whanki MuseumPoetic Imagery풍광과 전통기물, 시대적 인물상 등을 통해 민족 정서를 조형화했던 김환기는 전란 이후 조형추구에만족하지 않고 대상을 관조적으로 마주하는 확장된 의식을 갖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소재의 관념화로 이를 통해 자연과 그 자연에서 피어난 서정의 세계를 담고자 했으며, 파리시기에 와서는 ‘십장생’이라는 소재를 활용하기에 이른다. 해·산·물·소나무·달 또는 구름·학·사슴 등 영원에 대한 염원을 담은 장생불사를 표상한 물상들 중 작가의 영원관념에 상응하는 것이 소재로 삼아졌다. 이러한 소재의 사용은 국제무대에서  서구 화가들과는 구별되는 독자적 변별성을 지녀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현실인식이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당시에 작가가 ‘예술이란 강력한 민족의 노래’여야 한다고 강조한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전통소재의 사용은 이전부터 회화를 비롯하여 공예품까지 선호되어 왔다. 시대의 흐름이 바뀌어서양의 재료가 유입되었을 때에도 많은 작가들이 전통적 미감을 계승하여 정체성 확립과 독창적시각언어의 획득, 한계를 넘어선 울림과 공감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이를 성공적으로 완성시킨김환기의 작품은 현재의 것임과 동시에 전통적이다. ‘근원적인 형태의 표상’, ‘민족을 상징하는시적인 감성’, ‘섬세하게 이끌어 낸 꿈의 색조’라는 평이 동양예술과 서구예술의 조화를 통해민족의 특징을 간직함과 더불어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었음을 뒷받침 한다.1957, < Jar >1957년에 제작된 출품작은 가로로 넓은 화폭이 두 번에 걸쳐 종縱으로 구획되어 세 단락으로 구성되었다.푸른색과 붉은색, 단 두 계열의 색상만으로 표현해낸 화면은 매화가지가 길게 뻗어 나와 가로지르고,구름 사이를 지나 온 새가 그 위를 날고 있다.

이들 뒤로 분할 된 면마다 원형을 그려놓았는데, 좌측에는 안쪽으로 외곽선의 반만 따라 색을 메워 달을 형상화 했고, 중앙에는 색상만으로 해를 형상화하였으며, 우측으로는 위와 아래에 사각의 틀을 추가하여 백자를 형상화 했다. 해를 그려 넣은 중앙은 여백을 살리면서도 양측으로는 기하학적인 색면을 가미했다. 색면의 형태가 원형 안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남에 따라  채움과 비움의 자연스러운 도출을 보여준다. 또한, 전반적으로 푸른 화면에 생기를 부여하고 화면 밸런스를  잡아주고 있다. 다양한 소재를 개별 구성하고 평면적으로 표현했음에도 소재 간 유기적 연결성으로 인하여 시공간을 초월한 화면으로 귀결되었다.

출품작의 중간 제작과정은 파리 생루이 작업실에서 촬영된 사진을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다. 제작과정을 확인 할 수 있는 작품들이 많지 않은데, 이 작품은 세 컷의 사진을 바탕으로 확인 가능하며 작가와 함께 중점적으로 촬영되어 작품에 대한 작가의 애착을 느끼게 한다. 출품작에 대한 애정은 작가 뿐 아니라 대중도 같다. 출품작은 2012년 1월 6일부터 2월 26일까지 갤러리현대에서 열린《한국현대미술의 거장–김환기》 전시에 선보였다. 박수근, 장욱진에 이어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한 대규모 회고전 성격의 전시로 시대별 특징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 60여점이 선별되어 5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발걸음 한 전시였으며, 당시 전시를 계기로 발행된 마로니에북스의 작품집 『김환기 1913-1974』의 표지 이미지로 사용되었다. 작품집 혹은 전시장 외에도 출품작을 접할 수있다.

또 하나의 문화공간인 공연장으로, 대학로에 위치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메인 커튼이 김환기의이미지로 수놓아 옮겨져 있기 때문이다. 개관 당시에 설치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이 메인 커튼은 세로 8m, 가로 17m의 대형 커튼으로 매 공연마다 600여명 관람객들의 공연 시작 전의 설레임과 종료 후의  아쉬움을 함께 나누며, 하나의 문화 이미지로써 자리하고 있다.“ 김환기가 그의 화폭에 담아 온 노래는 말할 나위도 없이 한국의 자연과 그 자연에서 꽃피어난 서정의 세계, 바로 그것이었다. 한국인의 염원이 담긴 노래, 그는 삼 년간의 파리생활에서도 언제나 이 노래를 불렀다.1957, 1958년을 전후로 해서 많이 등장하는 ‘영원의 노래’, ‘영원한 것들’이란 일련의 영원의 모티프는 이 노래를 가장 극명히 대변해 주는 것들이다.

‘영원의 노래’ 또는 ‘영원한 것들’은 한국인의 영원관념에 상응되는 소재들을 재배치한 것이었다. 달, 구름, 학, 사슴, 산, 매화, 백자, 나무 같은 한국인들의 영원관념에 오랫동안 절여진 소재들이 분할된 평면 속에 배치된 작품들이었다.”- 오광수(1996), 『열화당미술문고 209 김환기』, Youlhwad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