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ERATURE
『부내박창훈박사매립목록』(경성미술구락부, 1941), pl.53.
조선미술관, 『조선명보전람회도록』(매일신보사, 1938), pl.26
조선미술관, 『조선명보전람회도록』(매일신보사, 1938), pl.26
작품 설명
이 작품은 헐성루歇惺樓에서 조망한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담은 것으로, 허필이 직접 남긴 제발과 더불어 남백당 권항언權恒彦과 미상의 인물이 남긴 화제가 함께 전한다. 허필의 글에 따르면, 당대 문장가였던 최창헌이 금강산 유람을 다녀온 후 연객에게 그 풍광을 그림으로 그려달라 주문한 것이 작품의 제작연유이다. 허필은 1744년에 이미 금강산을 다녀온 바, 그때의 기억을 살려 그림 제작에 몰두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처럼 전도식으로 금강산을 조망하면서도, 부감시俯瞰視보다는 실제 보이는 풍광에 가깝게 그렸다. 또한 바위의 형태들을 의인화시키면서 이를 소략한 필치로 쭉 나열해 1759년에 그린 〈묘길상도妙吉祥圖〉만큼이나 독특한 자신만의 금강산 그림을 완성해냈다. 또한 작품은 일제강점기 유명 수장가였던 박창훈朴昌薰, 1897-1951 박사 구장품으로, 그 소장내력이 상세히 전한다.
무상無上의 기달怾怛, 금강산의 이칭은 수미산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천하의 으뜸이다. 예로부터 시인이 읊어낼 수 없고, 화가가 그려낼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감히 당돌하게, ‘봉우리는 모두 흰 바위이고, 나무들은 모두 단풍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 화폭에 붓을 대, 해악전신도海岳傳神圖를 만들어, 담무갈曇無竭, 법기보살이 의아하게 여기는 것도 회피하지 않으려 한다.
금강산에서 막 돌아온 현재弦齋 최주헌崔周憲, 최창헌 노형이 내게 그림을 요청했는데, 내 감히 그의 간절한 뜻을 애써 거부할 수 없어 어두운 눈을 비비고 아둔한 솜씨를 부려 산창山窓의 완상물로 삼게 하고자 한다. 아래쪽에 박중함朴仲涵, 박사해朴師海이 ‘빈학정賓鶴亭’ 세 글자에 대한 글을 쓰고, 강광지姜光之, 강세황가 팔분八分, 서체의 하나으로 거주지의 편액을 쓰고, 또 그의 소조小照, 초상화와 사군四郡의 강산과 청하현淸河縣 내연산內延山 용추龍湫를 그려주었다. 그밖에 이런저런 그림 등 말미에 강세황光之이 직접 발문을 썼다. 이윤보李潤甫, 이중해李重海의 후면 발문은 수십 축이다. 그대의 전모前茅를 부러워하며 비로소 천리마에 탄 소원을 이뤘으나, 나의 보잘 것 없는 돌멩이 부끄러워, 개꼬리로 담비꼬리 대신한다는 비난을 받을까 두렵다.
약사원藥師院에서 연객烟客과 함께 이 그림을 열람했었으니, 갑자년1744 가을이 어제만 같다.
남백당南白堂, 권항언權恒彦
갑신년1764 삼지월11월 상완에 연객 허필 여정汝正 그리다.
오강吳剛이 계수나무 찍으며 여유가 많아, 연꽃 일만 이천 개를 다시 깎아 놓았다. 꽃은 허공에 흩뿌리고 뿌리는 땅에 꽂으니, 뭇 신선들 시끌벅적 손뼉을 친다.
서계西溪, 朴世堂 선생의 「헐성루歇惺樓」이다.